참고로 본 연구원이 이 인터뷰의 발단을 제공한 개발자들 중 하나다. 그리고 추천 당시 염려했던 그대로, 많은 사람들이 자극적인 표현에 낚여서 (여기엔 인벤이 제목을 자극적으로 단 것도 원인이지만) 껍질인간님이 생각하고 있는 본질과 관계 없는 덧글을 달거나 비웃고 있다.

평소 껍질인간님의 블로그, 데들리 던전에 대해 글을 쓸 생각이 있었던 터라, 사람이 양심의 가책 없이 심심해질 수 있는 시간은 불금 저녁에 한번 글을 써보고자 한다.

껍질인간님에 동조하지 않는, 비난가 - 제대로 정독하지 않고 맥락을 읽지 못한 채 단어에 낚여서 욕을 퍼붓기 때문에 비판가가 아닌 비난가라고 표현한다 - 들이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내가 재미있게 한 게임을 쓰레기라고 하다니! 난 용서할 수 없다!!!' 사실 데들리 던전은 이전부터 발더스 게이트를 RPG를 망가뜨린 주범이라며 비난했고, 베스트 셀러인 콜 오브 듀티를 게임이 아니라고 깐 걸로 유명했다.

모던워페어 리뷰의 별 0개의 의미는 빵점이라기 보다는 '점수없음'의 의미에 가깝다. 제작자가 플레이어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게임'이 아닌, 마치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영상 체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임이 아닌 것에 게임으로서의 점수를 줄수는 없다는 의미라 생각하길 바란다. 물론 멀티플레이는 배제한 싱글플레이 캠페인에 대한 평가다.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껍질인간님을 존중하는 건 비록 그 결론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그 근거가 명확하고 논리가 정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근거와 논리를 제거하고 결론만 갖다놓으면 그냥 망상가가 된다. 위 인터뷰에서 중요한 지점은 모던워페어가 게임이 아닌 영상체험이라는 부분이 아니라, 왜 게임이 아니라 영상체험인지가 되어야 했다. 그 부분에 대한 부연 질문을 했어야 한다.

여하튼, 데들리 던전에 FPS(및 그와 관련된 혼합장르) 게임 리뷰는 총 6개 포스트이다. 데이어스 엑스 (2/5), 데이어스 엑스 2  (4/5), 듀크 뉴켐 포에버 (2/5), 바이오쇼크 (2/5), 콜 오브 듀티 4 : 모던 워페어 (0/5), 크라이시스 (1/5). 이들 중 RPG로 평가받은 데이어스 엑스 1,2편과 바이오쇼크를 빼고 순수한 FPS는 듀크 뉴켐 포에버(이하 DNF), 콜 오브 듀티 4 : 모던 워페어(이하 모던), 크라이시스 이 세 작품 뿐이다. 특히 전 세계 모든 매체에서 칭송받은 모던이 0점인 반면 두들겨맞은 DNF는 2/5라는 비교적(=_=)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지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어째서 DNF는 게임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인가?

현대FPS들의 절대다수가 하프라이프 클론인만큼 DNF도 듀크뉴켐3D의 훌륭했던 비선형 레벨디자인을 버리고 하프라이프식 일방통행으로 변한것은 누구나 쉽게 예측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FPS들이 단순히 일방통행 레벨 디자인과 실시간 영화적 연출만을 가져와 슈팅파트만을 강조한데 반해서 DNF는 훨씬더 하프라이프에 가깝게 일방통행 통로에서 퍼즐을 풀며 길을 찾는 시간이 슈팅파트를 압도할만큼 퍼즐적 요소가 많은 구성을 보여준다.

(중략)

퍼즐만 봤을때는 하프라이프1과 2의 딱 중간수준으로 FPS로서는 준수하지만 그것만으로 하프라이프 수준의 레벨디자인에 도달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하프라이프가 비선형 레벨디자인을 포기면서까지 추구한 부분은 영화적 연출이었고 이는 단순히 콜옵식의 직접적으로 영화틀기 수준의 스크립트 연출이 아니라 게임플레이 자체를 영화적 연출로 승화시키고자 함이었다.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슈팅 상황 자체가 단순히 쏘고 피하기가 아니라 영화적인 장면처럼 진행되기를 원했고  퍼즐또한 대놓고 그냥 퍼즐이 아니라 스토리를 전개시키고 영화의 주인공이 된듯한 느낌을 주기위한 퍼즐이었다.

위는 DNF 리뷰에서 인용한 것인데, 하프라이프, 퍼즐, 비선형 레벨 디자인이 굉장히 자주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현대 FPS는 하프라이프가 아니라 콜 오브 듀티의 클론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FPS의 핵심을 1인칭으로 총을 쏘는것에 두고 있다. 사실 FPS라는 말 자체가 First Person Shooter가 아닌가. 따라서 울펜슈타인3D - 둠 - 하프라이프 - 모던워페어로 이어지는 계보를 그릴 수 있다. 아름다운 이땅에 금수강산에 울펜슈타인3D님과 둠님이 터잡으시고, 하프라이프는 스토리텔링을 게임플레이의 주된 요소로 편입시켰으며 모던 워페어는 한발 더 나아가 스토리텔링을 게임의 중심으로 승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게임플레이는 초반의 울펜슈타인3D에 비해 많이 달라졌지만 어쨌든 1인칭으로 총을 쏜다는 플레이는 바뀌지 않았다.

FPS는 던전RPG의 파생 장르나 시뮬레이션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하프라이프'식 레일슈터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껍질인간님에게 FPS의 본질은 총싸움만은 아니다.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껍질인간님은 FPS의 근원을 던전RPG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길찾기'는 FPS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며, '길찾기'가 사라진 대신 '퍼즐'이 있는 하프라이프는 서자라고는 해도 어쨌든 FPS의 가문에 포함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게 FPS라는 것이다. RPG나 어드벤쳐가 아니고 FPS란 말이다. RPG나 어드벤쳐에는 플레이어가 스토리를 진행시킬수 있는 수많은 행위가 가능하다. 근데 FPS라는 장르는 플레이어가 할수 있는 행위라고는 총을 쏜다와 길을 찾는다 밖에는 없다. 총을 쏘고 길을 찾는걸로 뭔가 대단한 스토리를 진행시키는게 가능하다면 애초에 하프라이프가 대단한 주목을 끌었을리가 없다

(중략)


실질적으로 이 게임에는 총쏘기가 없다. 달리기만 있다. 이게 무슨소리인지는 게임을 해본사람은 다 알것이다. 슈팅은 총을 쏴서 적을 없애는게 기본인데 모던워페어는 아무리 총을 쏴서 적을 없애봐야 적이 없어지지 않는다.

어느 길목에 놓인 작은 차 한대 뒤에서 엄폐하는 적이 한명 보인다. 그 길목을 지나가기 위해 적을 쏴서 잡는다. 근데 죽이자 마자 다시 한명이 고개를 내민다. 죽인다. 또나온다. 죽인다. 수십명을 죽였다. 계속나온다. 수백명을 죽였다. 그래도 계속 나온다. 아니 도데체 저 조그만 차 한대 뒤에 무슨 차원문이라도 있는것인지 궁금해서 그 차 뒤로 가본다. 그러자 갑자기 더이상 적이 나오지 않는다.

모던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길찾기가 없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게임에서 '총쏘기'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다. 총을 쏴서 적들을 다 죽인 후에 진행할 수 있다면 총쏘기는 이 게임의 핵심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모던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기준이 다 죽이느냐에 있지 않고 특정지점까지 이동하느냐에 있다. 총쏘기는 거들 뿐. 그러므로 이 게임은 총쏘기 게임이 아니라 달리기 게임이다. 총쏘기도 없고 길찾기도 없으므로 이 게임은 FPS가 아니다. 여기에 자동회복 등으로 인해 게임으로서의 난이도도 없으므로 게임도 아니라는 것이 모던에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요약하자면 껍질인간님에게 FPS 게임이란 던전RPG에서 전투가 슈팅으로 대체된 하부 장르로, '총쏘기'와 '길찾기'가 이 장르의 핵심적 게임플레이이다. 여기서 스토리텔링을 위해 '길찾기'를 '퍼즐'로 대체하는 것 까지는 인정해줄 수 있다. (탐탁치는 않지만) 이 논리 체계하에서 허접하나마 퍼즐이라도 있는 DNF는 FPS 가문의 서자인 하프라이프의 덜떨어진 후손으로써 5점 만점에 2점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총쏘기도 없고 길찾기도 없는 모던은 당연히 FPS가 아니다. 그리고 나머지 영역에서 게임으로써의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껍질인간님은 모던을 게임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내가 그렇게 재미있게 즐긴 게임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게임도 아니라고 까다니!'라고 분노하지만, 사실 여기서 '게임이 아니다'라는 평가는 저열하다기 보다는 평가할 수 없다는 의미에 가깝다. 다른 포스트들을 보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열차게 깐다. '메탈리카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와 '메탈리카 따위를 좋아하는 너네는 쓰레기다'는 엄연히 다르다. 물론 껍질인간님의 어투가 좀 공격적인 면이 없진 않지만 어쨌든 모던을 즐긴 유저들을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다.[각주:1]

일단 게임이 아니다 라는 부분을 떼고 보면, 모던에 대한 평가는 3단논법으로 정리될 수 있다.

전제1) FPS의 핵심 요소는 총쏘기와 길찾기이다.
전제2) 모던에는 총쏘기도 길찾기도 없다.
결론) 따라서 모던은 FPS가 아니다.

아주 깔끔하게 도출된 타당한 논리이다.[각주:2] 우리는 지난 대선 내내 같은 방식의 논리를 마주해왔다.

전제1) 한나라당에 반대하면 빨갱이다.
전제2) 문재인은 한나라당에 반대한다.
결론) 따라서 문재인은 빨갱이다.

제법 비슷하지 않은가? 이런 타당한 논리에 대한 비판은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던 전제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본 연구원이 비판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 FPS 게임의 본질인가에 대한 부분. 일단 FPS를 던전RPG의 파생장르라고 볼 수 있는 근거에 대한 의문이 든다. 아카라베스와 같은 RPG 게임들이 던전에서 1인칭 시점을 채택했던 것도 맞고, 위저드리 처럼 던전만을 강조한 던전 RPG들이 80년대에 흥했던 것도 맞다. 하지만 1인칭으로 미로를 돌아다니며 뭔가 물체를 쏘아내는 최초의 게임은 아카라베스(1979)보다 5년 전에 나온 Maze War였고, 이 Maze War를 보통 FPS의 시초라고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위키피디아 참고)

Maze War는 제목 그대로 미로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비슷한 시기의, 초창기 FPS 게임으로 함께 꼽히는 Spasim의 경우는 미로가 아닌, 우주 공간을 다루고 있다.

이 두 게임의 본질은 '길찾기'와 '총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인칭으로 보면서 공격한다'는 것에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만일 FPS의 역사에서 앞부분을 전부 뚝 떼어내고 울펜슈타인3D와 둠을 놓는다면 '길찾기'와 '총쏘기'가 핵심에 위치해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앞뒤로 위저드리와 울티마 언더월드를 놓는다면 던전RPG의 파생장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껍질인간님이 말하는 FPS는 우리가 생각하는 FPS와 전혀 다른 게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1인칭으로 쏘는 게임을 First Person Shooter라고 부른다. 따라서 길찾기가 있든 없든, 퍼즐이 있든 없든 1인칭으로 총을 쏜다면 그 게임은 FPS이다. 여기엔 버추어캅 같은 레일 슈터 게임들도 하부 장르로 포함될 수 있다. 반면 껍질인간님이 말하는 FPS는 총을 쏘면서 미로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열쇠 등을 얻어 진행하는 게임으로 울펜슈타인3D부터 둠2를 지나 다크포스[각주:3]까지의 게임을 말한다. 하프라이프는 여기에 서자로 끼워주는 것이고. 나는 이 분류가 FPS라는 장르 전체의 핵심을 관통하지 못하고 특정 시기의 게임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그래서 모던은 FPS 게임이 아니라는 결론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다.

사실 이러한 '장르 구분에 대한 편협함'은 FPS 게임보다는 RPG 게임에서 더 자주 보인다. 껍질인간님은 울티마 4 (5/5), 웨이스트랜드 (4/5)에 대해 후한평가를 내린 반면 드래곤 에이지 오리진 (1/5), 플레인 스케이프 토먼트 (2/5)에는 낮은 점수를 부여하고 있다. 발더스 게이트는 아예 리뷰 목록에도 없다. 다른 카테고리에서 열심히 까이긴 하지만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3대 RPG는 위저드리, 울티마, 인터플레이RPG 이고 각각 대응하는 대표적 특징으로서는 던전, 퀘스트, 룰 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할수 있다. 이 세가지 특징은 CRPG를 정의하고 발전시켜온 가장 중요한 특징들이었다.

껍질인간님은 무려 5편에 걸쳐 RPG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는데, 1부2부를 읽고 난 뒤에야 이분이 생각하는 RPG의 핵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본적으로 RPG는 Dungeons And Dragons와 같이 사람들이 모여앉아 주사위를 굴려가면서 하는 TRPG(Table-talk Role Playing Game)[각주:4]이 진리이다. 이 안에는 탐험도 있고 캐릭터의 연기도 있으며 즉흥성도 있고 몰입도 있다. 하지만 항상 모여앉아 플레이하긴 힘드니 컴퓨터로 이를 대체한 것이 CRPG(Computer Role Playing Game. 일반적으로 RPG라고 하면 이 CRPG를 일컫는다.)이다. 컴퓨터 따위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흉내낼 수 없으므로 CRPG는 본질적으로 TRPG의 불완전한 모사품이다. 하지만 던전 탐험에 대해서 죽도록 파고 들어간 '위저드리', 비선형적인 진행을 추구한 '울티마', 그리고 전투 외의 영역에까지 룰을 확장시킨 '웨이스트랜드' 이 세 작품은 플랫폼의 한계 내에서, 각각의 영역에서 플랫폼의 능력을 한계까지 뽑아냈으니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반면 드래곤퀘스트 등과 같은 일본 RPG들은 이 작품들 중 딱 전투만 잘라다가 스토리를 붙인 족보없는 녀석들로 RPG라는 이름이 붙어서는 안될 족속들이다.

발더스 게이트가 까이는 이유는 유서깊은 D&D 룰을 베이스로 하고 스토리를 강조한다면서도 던전(의 완성도), 퀘스트(의 비선형 구조), 룰(의 비전투 영역 적용) 어느 한 부분도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데아의 불완전모사에 대한 무성의한 불완전모사인 일본RPG에다 전투 룰만 D&D를 갖다붙인, 방계의 서자가 감히 CRPG 왕조의 적통으로 보위에 오른다는데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나마 드래곤 에이지 오리진의 경우는 종족 / 직업 / 배경별로 다른 도입부의 오리진 스토리에서 비선형적 퀘스트의 냄새라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별 1개라도 받아갔지만 그마저도 없는 발더스 게이트에게 별점 따위는 가당치도 않다.

다른 게임들에 대한 평가 기준도 사실 비슷하다. 해당 게임이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이에 따라 스토리가 (특히 메인 스토리가) 바뀌는 비선형적인 퀘스트 구조와 스토리를 지니고 있는가가 먼저 체크된다. (대부분은 여기서 탈락하면서 별점을 절반 정도 잃는다.) 만일 스토리가 선형이라면 게임을 계속 플레이할만큼 충분한 동기를 제공하는지를 체크한다. (그리고 보통 여기서 별점을 추가로 잃는다. 선형 구조인데 스토리를 칭찬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전투가 재미있거나 던전이 재미있으면 별점을 받는다. 대부분의 게임들이 비선형성에서 별점을 잃기 때문에 많지 않은 리뷰지만 별 4개 이상을 받은 것은 웨이스트랜드와 울티마4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한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도대체 TRPG에서 언제부터 그렇게 스토리가 중요했던 건가? 최초의 RPG라는 D&D의 기원을 파면 워게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태초에 나폴레옹 시대의 가상 독일 마을에서 2개의 군대가 싸우는 브라운슈타인이라는 게임이 있었다. 데이브 웨슬리는 여기에 시장, 은행가, 대학 총장 등의 다른 인물들을 추가함으로써 다자 참여 게임을 만들었다. 특히 기존의 보드게임과 달리 플레이어와 캐릭터가 1:1로 매칭이 된다는 점[각주:5]과 플레이어간에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구조가 RPG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변종 브라운슈타인에 영감을 받은 게리 가이각스는 체인메일이라는 중세 배경의 미니어쳐 워게임을 제작하는데 여기에 기본적으로 판타지 설정에 대한 보충자료가 동봉되어있었다. 이 체인메일에선 캐릭터들이 경보병, 중보병, 장갑보병, 경기병, 중기병, 중장기병으로 나뉘어 각각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고, 판타지 확장팩에선 마법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캐릭터 별로 다양한 기능과 속성을 지니며 이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원칙이 성립된다.

그리고 여기에 성장까지 포함되면서 드디어 최초의 Role Playing Game인 Dungeons and Dragons가 탄생한다. 전사와 마법사와 도적과 엘프와 드워프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지하 감옥을 돌아다니다가 성장하는 게임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Role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 RPG를 '역할 연기 게임'으로 번역할 때 캐릭터의 연기를 '역할연기'로 착각하곤 하는데 사실 태초의 RPG엔 그딴거 없었다. 정확히는 몰입하고 연기할 캐릭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RPG에서의 Role은 주체로서의 한명의 인간, 캐릭터가 아니라 전투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유닛으로서의 Role을 말한다. 함정을 찾고 잠긴 상자를 여는 도적의 역할, 다친 동료를 치료하는 성직자의 역할을 준수하고 이를 즐기는 것이 태초의 Role Playing 이었다. 이 도적이 호색한인지 아닌지, 성직자가 술을 좋아하는지 마는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는 애초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D&D에서 캐릭터의 가치관을 질서-중립-혼돈으로 나누는 것은 이런 연기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각 가치관을 대상으로 하는 스펠 구조 때문이었다.

스토리 역시 마찬가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지 어떤 던전을 터는지가 중요했고 여기에 대한 이유만 대충 붙여줄 수 있으면 상관없었다. 심지어는 캐릭터 시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아무 플레이에나 끼어드는 케이스도 가능했다. D&D의 세계에 여관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물론 TRPG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스토리에 재미를 느끼고, 그러다보니 나중엔 아예 스토리를 주로 즐기는 스토리텔링 게임들도 나오긴 하지만 어쨌든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RPG는 그냥 던전파고 다니면서 함정 피하고 전투하며 노는 게임이지 선택과 결과가 서로 연쇄를 이루는 장엄한 스토리를 즐기는 게임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발더스 게이트와 드래곤 에이지 오리진은 능력과 속성이 분배된 여러 클래스의 캐릭터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전투를 벌인다는 RPG의 기본 속성을 매우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으며 벰파이어 마스쿼레이드 블러드라인(이하 VMBL)에서 대화의 연기를 극찬한 것은 사실 RPG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또한 CRPG의 중요한 특성으로 계속해서 비선형적이면서도 서로 맞아 떨어지는 퀘스트 - 스토리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언급되는 게임은 울티마4,5,6과 웨이스트랜드에 그친다는 점도 지적할만한 부분이다. 만일 그런 구조가 CRPG의 중요한 구성요소라면 다른 게임들도 비슷한 노선을 추구했어야 하고 이 안에서 우/열이 나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게임의 사례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속성은 CRPG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요소라기 보다는 일부 게임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이 부분은 껍질인간님의 FPS관이 울펜슈타인3D ~ 다크포스 + 하프라이프에 이르는 특정 기간에 한정되어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FPS에서도 RPG에서도 '정통'을 주장하지만 실제 그 '정통'은 기원과는 관계 없이 그 장르가 어느정도 형성된 특정 지점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이후의 변화는 사문난적으로 배척한다. 이미 그 '정통'이 본질에서 어느정도 진화가 된 이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좋아하는 부분 까지의 진화는 인정하지만 그 이후의 진화는 인정할 수 없다'는 상당히 모순된 입장이다.

종종 껍질인간님의 블로그를 남에게 소개할 때 '머리는 잘라도 머리카락은 못자른다며 위정척사를 부르짖는 구한말 선비'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이게 정말 괜찮은 비유다. 춘추 전국 시대 공자와 맹자는 인간이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유학을 창설한다. 그리고 주자가 이를 기반으로 인간의 본성에까지 탐구해 들어가면서 성리학이 발생한다. 조선은 당대 최신의 유학이었던 성리학에 입각해 세워진 국가였다. 하지만 본고장인 중국의 성리학은 현실세계로의 실천을 강조한 양명학으로 발전해나가지만 조선은 이 양명학마저 이단으로 치부해버린다. 이 점이 껍질인간님의 스탠스와 상당히 일치한다.

난 극히 평범한 PC 게이머 중 1인에 불과하다. 단지 PC 게이머가 멸종위기라 내가 신기하게 보이는 건가.

사실 껍질인간님의 게임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바로 이 'PC 게이머'라는 단어에 있다. 사전적으로만 풀이하자면 PC 게임은 PC에서 돌아가는 게임이고, PC게이머는 PC를 주된 플랫폼으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겠지만 데들리 던전 블로그의 '빠큐'라는 코너에선 PC게임을 별도로 정의하고 있다.

제가 말하는 PC게임이란 단순히 PC로 나오는 게임을 말하는게 아니라 70년대 말~80년대 초반에 북미에서 처음 시작된 어드벤쳐/RPG/워게임/시뮬레이션류에 뿌리를 두고 영향받은 게임들을 일컫습니다. 그러면 왜 PC게임이나 리뷰하지 콘솔게임을 리뷰하냐고 묻는다면 현재 PC게임이 콘솔게임에 완전히 편입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PC게임이 콘솔게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FPS나 RPG는 순전히 PC게임쪽에서 시작되어 콘솔로 넘어온 장르입니다. 그러니 제가 콘솔FPS/RPG를 리뷰한다고 해도 PC게임쪽에 치중된 관점을 가지고 리뷰하게 됩니다. 게임전체에서 보면 편협하다고 해도 할말이 없지만 PC게임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전혀 편협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축구선수가 야구못한다고 잘못된 선수는 아니지 않습니까? 축구선수가 야구까지 잘할려고 하다보면 결국 둘다 못하는 어정쩡한 선수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 적나라한 차이를 드러낸 댓글이 있었는데 어느 포스트에 달렸는지 까먹었다. 내용은 '원래 콘솔은 코흘리개 애들이나 갖고 노는 것이고 PC는 고학력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소유물이었음! 그러니 PC 게임은 당연히 말초적인 콘솔게임보다 더 머리쓰는 게임임' 뭐 이런 거였다. (생각나는 대로 쓴건데 당연히 왜곡이 들어갔으리라 생각된다...)

PC게임, PC게이머라는 단어에 얽메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실 모든 오해는 사라진다. '"70년대 말~80년대 초반에 북미에서 처음 시작된 어드벤쳐/RPG/워게임/시뮬레이션류에 뿌리를 두고 영향받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때와 같은 게임이 나오지 않음을 한탄하며 지금의 게임을 그때 그 시절의 잣대로 평가한다. 이것이 데들리 던전의 본질이다. 말투가 좀 자극적이긴 하지만 나라 잃은 신채호 선생의 글이 얼마나 과격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아니다. 다만 다음 인용과 같이 드문드문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좀 걱정스럽긴 하다.(발더스 게이트가 없었다면 서양 RPG의 입문작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겠지.. 폴아웃 그 대사 많고 복잡하고 어려워보이는 게임을 어떻게...)

만약에 발게이가 없었더라면 윈도우98이후 서양RPG의 입문작은 폴아웃이 됐을겁니다. 실제로 발게이 전까지 가장 유명하던게 폴아웃이었거든요. 그랬다면 서양RPG가 그냥 전투가 좀 더 재밌고 사이드퀘스트가 많고 이동이 자유로운 일본RPG의 확장판이라는 오해는 없었겠지요. 다른 RPG들이 오해의 피해를 입을 일도 없었을테구요. 발게이를 통해서 아케이넘같은 게임을 접할 사람들은 발게이 대신 폴아웃이 있었으면 훨씬 일찍 아케이넘을 했을 사람들입니다. 디아블로 하던 사람들은 어짜피 RPG팬이 될 가능성이 없는 캐주얼 게이머들이 대다수였구요.

그렇다고 해서 데들리 던전이 읽을 가치가 없는 곳이냐면 그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껍질인간님이 과거의 게임에서 칭찬하고 있는 부분들은 분명히 현대에 복각해서도 재미있을 법한 요소가 많다. 리소스와 마켓의 한계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까이는 게임들도 분명 필요 이상으로 난타당하고 있긴하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편협한 안목이지만 그 안에서의 논리는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정연하다. 이렇게 잘 정돈된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며 나 또한 PC게이머의 끄트머리를 경험한 세대로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뉴턴 물리학은 시간과 질량의 절대성을 기반으로 자연계의 힘과 그 작용을 밝혀냈다. 하지만 광속의 세계는 이 질량과 시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상대성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뉴턴 물리학이 필요 없는 건 아니다. 뉴턴 물리학은 여전히 많은 영역을 설명해줄 수 있다. 중요한건 뉴턴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고, 상대성이론은 뉴턴 물리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정리되었다는 점이다. 어떠한 훌륭한 철학이나 이념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한 여기서 새로운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 어떠한 비판이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교조주의는 고사만을 불러올 뿐이다.

사실 본 연구원도 한때는 저런 교조주의를 고집하던 때가 있었다. 영웅전설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아가씨에게 '남들이 재미있다고 하니 재미있겠지만 난 그따위 일본식 RPG는 RPG로 인정할 수 없어!'라고 이야기 한다거나, 디아블로 시리즈에 대해선 '성장만 남은 잡종 RPG따위 난 인정할 수 없다!'라고 외친다거나. (그래놓고 어스토와 창세기전, 이스와 젤리아드는 엄청 즐겼다는 것은 함정) 그런데 2005년에서야 겨우 접한 디아블로2는 엄청 재미있었다... 그리고 미친듯이 즐겼던 구공화국의 기사단이 결국은 일본식 RPG였다. 그러고 나서야 게임은 게임일 뿐, 재미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제작비가 늘어나고, 또 이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과거보다 훨씬 많은 대량의 유저를 타겟으로 잡으면서 게임들이 점점 획일화 되어가고 속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복제에만 집착하는 현재의 게임계 - 특히 싱글플레이어 게임계 - 는 나 역시 걱정스럽다. 하지만 이런 경향 속에서 게임을 즐기는 인구는 과거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천만장씩 팔리는 게임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재미가 탄생하고 있기도 하고.

누가 뭐래도 게임은 대중을 상대로 한 문화상품이다.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죽듯이, 대중과 호흡하지 못한다면 대중문화는 소멸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대상으로 하는 대중의 성향이 변화한다면 게임도 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살아남은 게임들은 이미 변화한 상태이고, 그 게임을 하는 우리도 과거와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다.

발더스 게이트는 처음 나왔을 때에는 하다 관뒀지만, EE 버전을 하니 여전히 힘들었다. 그토록 칭송하던 시스템 쇼크2는 2003년에도 클리어하고 2007년에도 클리어했지만 2013년 GOG 버전으로 다시 시도하니 어렵고 불편해서 못해먹겠더라. (특히 인벤토리와 총기 고장) 그 재미의 본질은 사람 하나 없는 우주선에 홀로 남겨진 고독과 그로 인한 공포이지 인벤토리의 빡빡함과 총기 고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바이오쇼크를 시스템 쇼크2의 정신적 후계작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건 인벤토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고독과 공포가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난 과거에 재미나게 했던 게임 그대로를 원하지 않는다. 21세기에 유행하는 복고풍 나팔바지가 과거 아버지세대의 그 나팔바지가 아닌 것 처럼, 훌륭했던 게임의 유전자가 현대의 감각으로 부활해주길 바랄 뿐이다.

-덧-

그런 점에서 레전드 오브 그림락은 불합격. 정통 1인칭 파티제 던전 크롤러를 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21세기에 한칸 한칸 움직이는 던전이라니! 그건 이미 마이트 앤 매직6도 극복했고 위저드리8과 위저드 앤 워리어즈도 극복한 문제였다긔!! 그리고 왜 쓸데없이 전투는 현대화해서 실시간 탑재하고, 마법은 뜬금없이 룬 문자를 클릭하게 한거임...

  1. 물론 간접적으로는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술. [본문으로]
  2. 논리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내용의 참됨이 아니라 구조의 완결성에 존재한다. [본문으로]
  3. 둠2 엔진으로 스타워즈 세계관을 구현했던 게임으로 높낮이만 있던 둠2에 비해 다층 구조를 지니고 있고 스위치 조작에 의해 맵 차체가 변화하는 등 FPS 중 '길찾기'의 재미가 극한까지 강조된 게임. 제다이가 아닌 일반 병사를 주인공으로 한 게임이기도 했지만 추후 제다이 나이트 시리즈로 이어지면서 주인공인 카탄 카일이 제다이가 되어 이 부분은 희석된다. [본문으로]
  4. 다른 표현으로는 Pencil and Paper Role Playing Game 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5. 대부분의 보드게임 / 워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여러 캐릭터 - 코스티켄 식으로 말하자면 게임토큰 - 을 다룬다. [본문으로]
by 고금아 2013. 3. 16. 0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