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왕의 귀환?

지난 3월, www.baldursgate.com에 의문의 카운트다운이 뜨면서 정통 RPG 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새로운 발더스 게이트 신작이 나오는 것인가? 트로이카 / 바이오웨어 없이 만들어지는 발더스 게이트 신작을 우린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카운트 다운이 끝나고 발표된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계획이었다.

오리지널 발더스 게이트가 HD 환경으로 리메이크 된다. 이름하여 Baldur's Gate Enhanced Edition (이하 BG:EE)


1. 리부트가 아닌 개선판

이후 추가 정보가 속속들이 밝혀졌다. BG:EE는 오리지널 Baldur's Gate(이하 BG)의 엔진의 개량판을 사용한다. 바꿔말하면 여전히 2D 그래픽일 것이며, 이 그래픽은 기존 BG의 소스를 활용한 것으로 새로 제작되는 것은 아니다. 윈도우 뿐만 아니라 Mac OSX와 아이패드, 안드로이드로도 발매된다. BG 외에 확장팩인 Tales of the Sword Coast까지 포함되며 Baldur's Gate 2 (확장팩 포함)도 출시된다. 또한 시장에서의 반응이 좋으면 추후 Planescape : Torment와  Icewind Dale 시리즈도 출시할 수 있다. 가격은 $19.99 (iPad용은 $9.99 + 인 앱 추가 결제)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반면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제외하면 판매량이 이전에 미치지 못하는 현대 게임계에서 오래된 IP로 게임을 리부트하는 것이 최근 유행이긴 하다. 그리고 이렇게 성공한 게임들은 공통적인 특성이 있었다. 구 IP를 완전히 복각하는 것이 아니라 원작 당시보다 훨씬 캐주얼해진 유저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핵심 재미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간략화하고 편의성을 더했다는 것. 그런데 BG:EE는 대범하게 리부트가 아닌 개선판을 선택했다. 그래픽을 3D로 일신한다거나, 최근 RPG의 필수 요소가 된 ? ! 마크를 달아준다거나 이런 개선 없이 순전히 HD 화면에서 돌아가게 만든 버전인 것이다.


2. 원작과의 경쟁

물론 BG가 당대의 명작이라고는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이 게임이 과연 현대 유저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당시에도 편의성이나 접근성이 높은 게임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결국 이 게임의 핵심 타겟은 이미 기존에 BG를 플레이해본 유저가 될 것이다. BG의 이름만 들어본 신유저층이 이 게임의 퀄러티에 감흥해서 불편을 감내하면서 기꺼이 플레이할거라는 망상에 빠진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한가지 함정은 있다. 이미 기존의 BG를 GOG에서 확장팩 포함해서 단돈 $9.99에 구입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 GOG는 고전 게임들을 최근의 PC환경에서 판매하는 것으로 이미 상당한 유명세를 쌓아 최근엔 일부 신작 게임들도 출시되고 있는 디지털 유통사이다. 그것도 DRM 없이. 반면 BG:EE는 Beamdog이라는 듣보잡무명 디지털 유통사를 통해 독점으로 배포된다. (iPad나 MacOSX용은 당연히 앱스토어)

더 유명한 유통사에서 반값에 팔리고 있는 원작과 경쟁하려면 어지간히 잘 만들지 않으면 안될 터. 과연 BG:EE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도 구입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3. 기대 이상의 그래픽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확대됨)

일단 소스 보정 + 3D 가속을 받은 화면은 우하단의 BG 화면에 비해 약 500% 확대한 것인데도 다소 뿌옇긴 하지만 생각보다는 괜찮은 화면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줌인 / 줌아웃을 지원하기 때문에 줌을 밖으로 빼면 꽤나 선명한 화면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단, 줌인은 사실상 사용하면 안된다....


위 그림은 BG의 스크린샷이다.(필터링 없이 세로 폭 맞춰 확대한 사진) 이렇게 놓고 보면 옛날 게임인데도 그래픽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해상도가 640X480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걸 현재의 화면에 풀스크린으로 띄우면, 아래 그림들처럼 도트가 엄청나게 튀어서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래픽은 물론 글자는 더욱 알아보기 힘들다. 물론 창모드로 돌리면 도트가 튀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창모드에선 화면 구석으로 커서를 옮기면 맵이 스크롤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하므로 사실상 대책이 될 수 없다.


다음은 비슷한 영역을 EE에서 봤을 때의 모습이다. (티스토리가 가로 해상도를 650까지로 제한해 풀 스크린샷 비교가 안된다.) 일단 게임 그래픽은 다소 뿌옇다는 느낌이 있지만 게임에 지장을 주는 상태는 아니다. 아이콘과 텍스트는 확실히 HD에 맞춰 새로 찍어서 선명하게 잘 보인다. .

만일 집에 640X480을 지원하는 CRT 모니터가 있다면 BG:EE보다는 BG쪽의 그래픽이 좋다. 하지만 고해상도 LCD를 가지고 있다면 BG는 사실상 플레이할 수 없는 반면 BG:EE는 그럭저럭 괜찮은 화면을 보여준다.


4. BG2의 시스템 적용

BG:EE는 발더스 게이트부터 아이스윈드데일까지 이어진 인피니티 엔진의 개량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게임 전체 시스템이 후기 작들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상단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초기 버전의 인피니티 엔진으로 만들어진 BG는 단 8개의 직업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BG:EE는 11개의 기본 직업에 각 직업별로 4가지 이상의 세분화된 직업을 제공한다. 스킬 시스템 또한 마찬가지다. 이미 BG를 경험한 사용자라도 새로운 직업과 스킬로 인해 다시 플레이하는 경험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기존 BG에 BG2의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용자 Mod도 있다고 하나 편의성 측면에서 논외로 치자.)


5. 새로 추가된 캐릭터들과 시나리오

BG:EE에는 3명의 캐릭터가 추가되었는데 셋 모두 독특한 성격과 능력을 지니고 있어 새로운 재미를 준다. 특히 가운데의 Neera는 Wild Mage로 메모라이즈 없이 아는 마법을 불러낼 수 있지만 원하는 마법 대신 다른 마법이, 그것도 아군에게 쏟아질 수 있는 위험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하지만 본인은 그대로 봉인시켰다...) 좌측의 Rasaad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으나 복수심에 불타는 하프 오거인 Dorn(우측)도 만만찮은 성격으로 재미있는 친구였다. 강력한 것은 둘째치고 말이다.

신규 추가된 시나리오인 Black Pit은 아직 플레이 해보지 못했지만 앞서 언급한 BG2 시스템과 신 캐릭터 + 신 시나리오 정도면 BG를 해본 유저들에게도 $20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6. 2D 애니메이션으로 대체된 CG 컷씬들

사실 게임 그래픽의 해상도야 가속 받아 필터링하면 봐줄만하다고 치더라도, 14년 전 CG로 제작된 컷씬들은 해상도로 보나 화면의 퀄러티로 보나 어떻게도 재활용하기 힘들었을 것은 쉽게 추측된다. 결국 컷씬들은 내용은 같고 구도는 유사하게 유지하되, 2D로 새로 제작되었다. 스틸 컷도, 그렇다고 풀 애니메이션도 아닌, 일종의 모션 그래픽으로 제작되었는데 굉장히 퀄러티가 높다.


7. iPad용

한편 $9.99에 판매되는 iPad용의 BG:EE는 iPad 2세대 이상을 지원하며 구뉴패드 레티나 디스플레이도 지원된다. 레티나가 아닌 1024X768 화면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레티나로 본 화면은 꽤 깔끔했다. 기본적으로 게임이 우클릭을 사용하지 않는데다 Tab키 대신 인터액션 가능한 물체를 하이라이트 해주는 우측 위에서 2번째 버튼이라거나, Q키 대신 퀵세이브 해주는 좌측 두번째 그룹 첫 버튼 등 터치 환경에 대한 배려가 제법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선택을 위한 탭과 스크롤을 위한 탭이 구분이 잘 가지 않으며 마법 등을 사용할 때 커서를 통해 대상의 유효성을 확인할 수 없는 점에서 아무래도 마우스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라리 가상 커서를 조작하는 방법을 고려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텐데 그렇다고 아주 못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패드로도 조작을 할만은 했다.


8. 버그.. 버그.. 버그...

당초 9월 발매에서 2개월이나 연장되었지만 버그가 많은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상단 그림처럼 저널의 내용이 안보인다거나, 하단 그림처럼 아이템의 가격이 표시되지 않는 등 자잘한 버그가 상당히 많이 발생하고 있다. (아이템 가격은 한중일 윈도우에서만 발생한다고 한다.) 가끔은 좌우 및 하단의 UI 패널들이 통째로 검게 변색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업데이트는 자주 해주고 있으나 위와 같이 눈에 띄는 버그들은 당장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아쉽다. 또한 같은 엔진이다 보니 원작의 바보같은 길찾기가 그대로 재현되어 던전에서 파티를 이동시킬 때 마다 뻘짓하는 캐릭터들 때문에 머여전히 골치가 아프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9. 원작의 팬이라면 살만한 작품. 원작의 팬이라면.

결론적으로 봤을 때 BG:EE는 원작의 팬이라는 입장에서 봤을 때 $19.99 정도면 납득할만한 가격이다. iPad용의 경우 다소 조작이 불편하긴 하나 어차피 패드를 제대로 지원하는 RPG가 없고 사실 이런 정통 RPG 자체가 없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꽤나 경쟁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문제는 BG를 경험해보지 못한 현 세대의 게이머들이다. 위에서 보듯 텍스트와 나레이션으로 상황을 읊어주는데다 당면한 퀘스트를 제대로 깔끔하게 정리해주기는 커녕 !나 ?도 없어서 헤메고 다녀야 하며 길이 조금만 좁다 싶으면 엄한데로 파티원들이 드라군 댄스를 추는 이 게임을 과연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미 정신적 후속작인 드래곤 에이지가 건재한 마당에 신규 유저가 굳이 이 게임을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된다.


-덧-

PC판의 경우 인텔 내장형 그래픽에선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인텔 내장 그래픽 칩셋이 오픈GL 2.0을 지원하지 못해 발생하는 것으로 발매 당일부터 수정하겠다고 하는데 아직 별 소식은 없다. 내장 그래픽 사용자 - 특히 노트북 - 은 구매를 피해야 할 것이다.


-덧2-

참고로 빔독의 다운로드 속도는 환상적이다. 70Kb/s.... 


-덧3-

현재 아이패드와 PC의 세이브 파일은 호환이 안되고, 한글도 지원하지 않는다. 둘 모두 패치를 통해 지원될 것이라고는 하나 구체적인 진행상황은 나와있지 않다.

by 고금아 2012. 12. 14. 0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