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디자인 포럼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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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페이스북에서 hwangmaru 님이 재미있는 글을 하나 소개해주셨습니다.


서포터는 왜 거지가 되었는가?

서 포터가 재미없는 희생적인 역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LOL을 안하다보니 CS 못먹어서 그렇잖아도 적은 돈으로 와드와 오라클만 사느라 신발과 시야석만으로 게임을 끝내야하는 정도라는 건 몰랐습니다. 링크한 글에선 이런 희생때문에 서포터 플레이 자체가 재미가 없고 그로 인해 인해 서포터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나쁜 경험을 하고 있으니 서포터 플레이 경험을 개선하기 위해 고통을 강제로 분담케하는 조치가 필요하며 그 방법으로 와드 구매에 제한을 두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OECD 최하위권의 독해력을 자랑하는 국가 답게, 서폿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는데 왜 까냐고 댓글들을 열심히 달았죠.

굳이 잘 플레이하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롤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이게 제가 전부터 생각해온, FPS의 병과 시스템의 문제와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게임이 요구하는 플레이와 플레이어가 원하는 플레이의 충돌이죠.

RPG 의 클래스건 FPS의 병과건, 기본적으로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서로 다른 능력을 분배하고 상호 협력을 유도함으로써 다양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겠죠. 이런 롤 플레이는 기본적으로 인구 수가 적절히 분배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당장 D&D만 보더라도 전사 법사 사제 도적 4명이 기본 아니겠습니까.

여러 클래스가 고루 필요하다는 것은 게임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재미있다는 것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게임 플레이죠. 그런데 각 플레이어가 어떤 클래스를 고를지는 철저하게 개인의 선택에 맡겨집니다. 클래스의 고른 분포는 상수로 요구되지만 실제 클래스 분포는 변수라는 거죠.

그 렇다면 이때 개인이 클래스를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재미가 될 것입니다. 협력이고 거시고 잘 모르겠고 일단 그 클래스가 재미있어 보여야 시작할테고, 실제로 재미있어야 계속 할테죠. 대부분의 게임들은 각각 클래스가 고유한 재미를 지니고 있고 그래서 유저들이 골고루 선택할 것을 전제로 설계될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처 음 리프트를 할 땐 전사 계열을 키웠습니다만, 중간에 서버를 옮기면서 힐러를 키워본 적이 있습니다. 막상 전투에 들어가자 제가 할 일이라곤 그냥 짝대기 줄어든 파티원 찍어서 색칠하기 뿐이더군요. 남들은 뭔가 신나게 전투를 하는데 말이죠. WOW는 좀 낫냐고 물어봤더니 비슷하댑니다.

MMORPG에서 힐러들이 희귀한 것은 실제 플레이가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힐러가 재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힐러 플레이를 재미있어하고 즐기는 유저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 플레이 자체를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적다는 겁니다. (사실 개인적으론 그 힐러 재미라는게 인지부조화에서 오는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러다보니 힐러라는 플레이를 지탱하는 것은 게임 플레이 자체가 아니라 보상구조에서 오는 경우가 많죠. 힐러에게 경험치나 보상을 좀 더 후하게 주는 식으로 시스템 내부에서 정의된 보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희귀해서 파티나 공대를 찾기 쉽고 귀족 대우를 받는 것도 충분한 사회적 보상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그 보상으로 클래스를 끌고가는 것을 과연 잘 된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파티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이라면 당연히 어느 클래스를 고르든 파티나 공대 들어가기 쉬워야 하는게 아닐까요)

FPS 게임 역시 병과별로 무기와 특수능력을 동시에 제한하는 타입의 게임에선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FPS 게임에서 병과를 나누는 방법에 대한 것은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FPS게임에서 플레이스타일은 무기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습니다. SMG는 중거리에선 부정확하고 데미지도 약하지만 연사속도가 빠르고 일반적으로 이동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재빨리 접근해 근접전으로 게임을 풀어나가게 됩니다. 저격총은 먼 거리에서 줌도 되고 정확하며 데미지가 높기 때문에 장거리에서 강하지만 근거리에선 약하죠.

문 제는 병과별로 무기의 유형이 제약되게 되면 플레이어가 원하는 전투 스타일과 플레이어가 원하는 롤플레이가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유저 A는 쓰러진 동료를 일으키고 동료들의 HP를 채워주는 메딕 롤을 좋아하는 동시에 전투에선 중거리에서 점사로 끊어쏘는 플레이를 즐긴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의무병의 무기는 샷건으로 제한되어있단 말이죠. 그럼 유저 A는 원하는 전투 플레이와 원하는 롤플레이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반대로 다른 한쪽을 포기해야 하지요.

만 일 이 무기의 차이가 플레이 스타일의 차이 뿐만 아니라 전투력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배틀필드2의 경우 전장이 매우 넓고 피아 식별이 힘들기 때문에 '배 깔고 드러 누워 점사'가 가장 유리한 기동입니다. 그런데 대전차병의 무기는 근거리용인 SMG입니다. 일반 게임과 달리 교전 거리가 길기 때문에 플레이 스타일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냥 대인 전투력이 상당히 약한 것이죠. (그리고 실제로 데미지가 낮기 때문에 근거리에서도 강하지 않습니다.)

이런 밸런스의 핵심은 개개 병과가 사용하는 무기의 전투력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특수 능력의 효용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합산하면 결국 전체적인 전투력은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대전차병의 능력을 대인전투력 40% + 특수능력 60%라고 본다면 SMG보다 더 쓸모 없는 샷건을 사용하지만 탈것을 수리하고 대전차 지뢰를 깔 수 있는 공병은 대인전투력 30% + 특수능력 70%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무기를 제한해서 병과의 특성을 강조하면서도 특수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밸런스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무기에서 오는 병과의 특성'은 게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인전에서의 생존력과 결부되면서 보다 오래 살아남아 플레이하고 싶다는 욕구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공병과 대전차병 모두 평균에 한참 못미치는 분포를 보였죠. 게임의 핵심인 탈것을 공격하고 수리할 수 있는 메리트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롤플레이가 성립할 수 있는 기본 전제는 클래스별로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능력을 공통화시킴으로써 병과의 특성을 강조하고 협력을 유도하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제가 역사상 최고의 팀플레이 FPS로 꼽는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이하 울펜슈타인)의 경우죠. 울펜슈타인에는 의무병 - 공병 - 장교 - 병사의 4가지 클래스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중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 클래스들은 모두 같은 무기 풀을 공유합니다. 의무병은 치료 능력과 소생 능력을 지니고 공병은 수류탄을 좀 더 많이 가지며 폭약을 설치하고 해제할 수 있습니다. (울펜슈타인은 단계별로 목표를 이뤄나가는 속도를 겨루는 게임으로, 폭탄 설치는 어느 게임이든 한 단계를 클리어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장교는 탄약을 보급하는 한편 야외에선 공중 폭격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병사는 이들보다 HP가 높으며 기본 공용 무기 풀에 더해서 저격총이나 화염방사기, 미니건, 로켓포 중 하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체 전투력의 합산을 100이라고 본다면 병사는 순수히 전투력으로 100%, 나머지 병과는 모두 대인 전투능력 50% + 특수능력 50%를 채웠다고 볼 수 있죠.

대인 전투력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유저는 순수하게 자신이 어떤 능력을 원하는지에 따라 병과를 선택합 니다. 사람 살리는게 좋다면 의무병, 공중 폭격이 좋다면 장교, 저격을 하고 싶거나 뭔가 화끈하게 싸우고 싶다면 병사를 고르면 되죠. 그래서 역으로 특정 병과에 쏠리는 일도 없고 인구 비율이 일정하니 롤 플레이도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런 방침은 이후 ET 시리즈와 Blink에도 이어집니다.

또 한가지 생각해볼 것은 병과가 너무 많을 경우 오히려 롤 플레이가 힘들다는 겁니다. 배틀필드2에는 총 7종의 병과가 있습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클래스별로 인구가 균등하게 배치된 이상적인 상황에서도 내가 도움을 필요로하는 클래스는 7명 중 한명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물론 팀포2는 12개의 클래스가 존재합니다만 이들은 사실상 협동 롤플레이를 유도하기 위해 존재한다기 보다는 여러가지 플레이 타입을 제공하는 구성입니다. 의무병을 제외하면 특별히 게임 중 특정 클래스의 도움을 강력히 필요로하는 경우가 없죠.

배필온의 악명높은 '병과 통합 및 총기 공통화' 패치는 바로 여기에 착안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총기를 공통화하는 대신 특수 능력을 압축해 병과 수를 줄였죠. 대인 전투력에 차이도 없기 때문에 유저들은 순수하게 원하는 플레이에 따라 클래스를 선택할 수 있으므로 병과 편중이 해결되었고, 병과의 절대 수가 줄었기 때문에 필요로하는 클래스를 만날 확률도 높아졌습니다. 대전차병이 소총까지 들면 너무 강력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반대로 공병은 수리와 C4를 들고 있습니다. 의무병은 치료 + 소생이 가능하죠. 전체적으로 능력이 상향되면서 또한 능력이 뚜렷해졌기 때문에 병과별 밸런스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뭐 유저들은 게임 접는다 만다 말이 많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유저가 줄진 않았습니다. 대신 이 패치를 해도 게임은 여전히 어려웠고 캐주얼한 유저들은 이미 도망간 뒤였기 때문인지 기대한 것 처럼 유저가 늘지도 않았습니다. 개발 초기에 병과 통합을 좀 더 밀어붙였더라면 하고 생각합니다만 그땐 이미 이 통폐합안의 지지자였던 Voosco님이 도망가신 뒤였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렵니다. 뭐 어쨌든 패치 이후 통계상으로 부활, 수리와 같은 비전투 롤플레이의 빈도는 확실히 높아졌습니다.

그 외에 이 무기 공통화를 동반한 병과 통합이 가져온 확실한 성과가 한가지 있다면 총기 판매의 효율을 높이는데에도 일조했 다는 겁니다. 총기가 병과에 묶여있고, 또 병과가 다양할 경우 총기를 추가할 때의 효과는 그 병과의 갯수에 반비례해서 떨어집니다. 총기를 추가하는데 드는 비용은 일정한 반면(모델링과 애니메이션 등 에셋 제작 비용은 일정하짐나 사실 밸런스에 들어가는 노력은 병과수의 제곱에 비례합니다. 같은 계열 내에서 맞추는 동시에 다른 게열과도 맞춰야하기 때문이죠), 그 총기를 사용할 - 그래서 구매할 - 유저의 숫자는 쪼개지기 때문이죠.

FPS보다 더욱 더 롤플레이를 강조했던 MMORPG도 슬슬 이렇게 롤 보다 플레이 자체에 중심을 두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례로 길드워2의 경우 클래스가 다양한 이유는 싸우는 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워리어는 방패들도 붙어 싸우고, 환영술사는 환영을 불러내고, 네크로맨서는 좀비 부르고 뭐 그런 식입니다. 탱커 딜러 이런 구분 없습니다. 특히 힐러는 그냥 제거해 버렸죠. 정교하게 서로 호흡을 맞춰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는 롤플레이는 없습니다만, 대신 화끈한 화력전이 있습니다. 즐거운 축제죠. 최근의 마블 히어로즈 역시 힐러는 없고 근탱 - 근딜 - 원딜의 개념이 희박합니다. 붙어 싸우는게 불리하면 그냥 원딜이고, 잘 버티면 근탱, 근거리에서 순삭 당하진 않는데 실드나 유인기가 없으면 근딜이죠. 그냥 자기 캐릭터가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가장 잘하는 플레이를 하는 것 만으로 협력 플레이가 됩니다.

울펜슈타인이나 배필온이나 길드워2나 마블 히어로즈가 병과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한마디로 '부드러운 트레이드 오프'(제 가 생각해낸 개념입니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모두를 가질 순 없다. 하나를 얻는다면 하나를 잃는다. 이런 트레이드 오프는 게임의 핵심인 '의미있는 다양한 선택'을 만드는 핵심적인 장치이고 우리 모두 여기에 익숙해져있지요. 기존의 트레이드 오프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제로썸의 형식이었습니다. 속도가 빠르면 데미지가 적고, 공격력이 좋으면 방어력이 떨어지는 형식이죠. 저는 이것을 '단단한 트레이드 오프'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소프트한 트레이드 오프'는 제로썸이 아니라 플러스썸을 전제합니다. 무엇을 고르든 유저가 실제로 잃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고르지 못한 것은 얻을 수 없겠지만 이는 이미 가진 것을 잃는 것은 아니죠. 유저는 여러가지 플러스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됩니다. 부페에 온 것 처럼요. 선택의 다양성과 그로 인한 게임플레이의 깊이는 유지하면서도 체감 난이도를 상당히 낮출 수 있지요. 이게 클래스에 적용되면 클래스별 미시 플레이의 만족도를 높이는 동시에 롤플레이도 더 원활하게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처음의 롤 (Role 말고 LOL)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원글에서 제시한 와드 보유 제한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와드 사느라 템을 못사는 근본 이유는 와드를 여러개 가지고 있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1명이 희생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전술이 고착된 탓이니까요.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반대로 와드는 여전히 서포터가 박는데 갯수 제한 고려해서 전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정교한 타이밍에 기지로 귀환해서 와드를 보급해올 의무까지 덮어쓸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기지에 가는 만큼 골드 수입은 더 줄어들겠죠. 그럼 또 그 귀한 와드를 정교하게 박아야 할 의무도 지겠네요. 와드 제한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서 와드 박는 부담을 다 같이 나눠갖진다면 그건 의미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라면 모를까 EU 스타일이 완전히 굳어져버린 지금, 정해진 플레이를 그것도 욕먹어가면서 계속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만, 일면식도 없고 앞으로 볼 일도 없는 5명이 팀플하기 위해선 그런 정석이 필요하기도 하며 그게 롤 확산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라이엇이 서포터를 살리기 위해 EU 스타일을 깨버릴 수 있을지도 좀 회의적이긴 합니다. 차라리 서포터에게 함께 플레이한 팀메이트 중 한명을 골라서 하루 정도 밴 먹일 수 있는 권한을 주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by 고금아 2013. 7. 4.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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