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역시도 일-중 수집형 RPG의 캐릭터 판매를 둘러싼 BM과 게임 디자인 비교 2부에서 쓰고 있던 내용입니다만, 단일 게임에 대한 분량이 너무 많아져 별도 포스트로 분리합니다.


1. 어째서 또다시 영원한 7일의 도시인가?

영원한 7일의 도시(이하 영7)에 관한 포스팅이 벌써 다섯번째입니다. 12월부터 시작했으니 한달에 하나씩의 포스트를 써오고 있네요. 사실 이전에도 나루토, 드래곤볼 용주격투, 콘트라 리턴 등등 오랫동안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 플레이한 게임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영7만 포스트를 다섯개씩 쓰고 있는 것은 영7이 굉장히 흥미로운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게임들은 재미있는 게임이었습니다만 기획자로써 꾸준히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게임들은 아니었습니다. 다들 도탑전기라는 하나의 완성된 템플릿하에서의 변주들이었기 때문에 일부 기능이나 기법들이 단편적인 영감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긴 했어도 그게 계속해서 곰씹을만큼 혁신적이진 않았습니다. (나루토로 도탑전기류 게임을 처음 본격적으로 플레이했을 땐 컬쳐쇼크였습니다만)

하지만 영7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캐릭터를 가챠로 뽑는다는 사실 하나만 빼고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거나 사용해온 디자인 관습들을 따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게임 자체가 파격의 연속이에요. 그런데 이 파격들이 단순히 남들과 다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문법이 유지하고 있던 익숙한 문제들을 해결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획자 입장에서 영7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업계 짬밥으로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디자인 관습을 의심하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소개드릴 영7의 장비 시스템 또한 기존의 문법을 파괴함으로써 기존 문법이 갖고 있던 문제를 해결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총론 차원에서 '영7은 달라요'라고 뭉뚱그리기 보다는 얼마나 어떻게 왜 다른지를 시간을 들여 설명할 수 밖에요.



2. Deck 구성에서 오는 장비의 수평적 다양성

영7의 장비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장비의 장착을 슬롯이 아닌 Cost 단위로 컨트롤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일반적인 RPG 게임은 '무기' '갑옷' '투구' 등과 슬롯을 파놓고 각각의 슬롯에는 호환되는 장비를 장착시키죠. 그리고 통상적으로 무기는 공격력을 높여주고 갑옷은 방어력을 높여주는 등 슬롯에 대해 특징적인 기능을 정의해놓은 뒤에 같은 슬롯의 아이템 내에서 칼은 물리 공격력, 지팡이는 마법 공격력과 같은 식으로 수평적으로 분화시키며 다시 그 안에서 수치의 차이를 둬서 수직적으로 분화시킵니다.

반면 영7의 장비는 그런 슬롯에 대한 제약이 없습니다. 대신 각 장비마다 일정량의 Cost가 정의되어있고, 캐릭터가 가진 Cost 총합을 초과하지는 못하게 제약하고 있지요. 이 구성은 장비를 어떠한 실체가 있는 실물의 모사라기 보다는 능력치를 담고 있는 관념적인 컨테이너로 다룹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7의 장비 장착은 오히려 과거 확밀아와 같은 CCG 게임의 Deck 구성에 가깝습니다.

이런 Cost - Deck 구조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아이템의 수량을 늘리기에 굉장히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슬롯 혹은 장비 유형을 기반으로 하는 구조는 기본적으로 무기는 공격력, 갑옷은 방어력 등과 같이 장비 유형이 장비의 기능을 거의 대부분 특정지어버리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물공 / 마공과 같은 약간의 변주 외엔 다양성을 확보하기가 힘듭니다. 결국 S급이니 A급이니 해서 더 좋고 덜 좋음으로 인한 수직적 분화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가장 좋은 물건 하나씩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의미 없는 쓰레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물론 영7의 장비들이 슬롯에 대한 제약은 없다고 하더라도 물공템이니 마방템 등 대략적인 장비의 유형은 몇가지로 정해집니다. 하지만 동일한 스탯 구성을 갖는다고 해도 코스트에 따라서 장비가 분화될 수 있습니다. 마방템만 하더라도 코스트에 따라 1코부터 7코까지 7개의 유니크한 장비가 설정될 수 있습니다. 장비가 갖는 기본적인 성능은 코스트에 정직하게 비례하기 때문에 특별히 같은 유형 내에서 코스트에 의해 수직적 우열관계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1코든 7코든 똑같이 쓸모 있고 언제 몇코가 필요한지는 장비 덱 구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죠.

이런 코스트 - 덱 구성은 확밀아와 같은 CCG과도 그 결을 달리합니다. 확밀아에서의 코스트 구조는 수평적 분화 보다는 수직적 분화 효과가 더 큽니다. 절대 성능이 높은 카드에 코스트를 높게 잡아서 밸런스를 맞춘다고는 하지만 이는 장사를 위해 강캐를 계속 투입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동작합니다. (덱 전체에 대한 코스트는 계속 상승하기 때문에 고 코스트 카드의 덱 구성 페널티는 유명무실해지고, 코스트에 의한 행동력 소진은 과금으로 손쉽게 벌충되기 때문입니다. 누진제가 적용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저렴합니다.) 그리고 절대 성능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코스트 대비 성능이 좋은 카드가 좋은 카드의 지위를 획득하고, 나머지 카드들은 사실상 버려지게 되지요. 반면 영7의 장비들은 코스트 대비 성능에서 큰 차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덱을 더 유연하게 구성할 수 있으니 코스트가 낮은 카드들이 조금 더 유용하긴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다들 코스트 값을 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코스트 및 성능에 의해선 수직적 분화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결과물의 수직적 분화를 중시하는 게임이건, 수평적인 분화를 중시하는 게임이건 기본적으로 랜덤한 결과물을 얻는 구조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힘들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수직적인 분화는 이러한 시도의 결과를 '성공'과 '실패'로 구분짓습니다. 좋은 템이 떨어지면 성공이고 좋지 않은 템이 떨어지면 실패죠. 그리고 당연히 사용자 경험의 대부분은 실패입니다. 반면 영7은 수평적인 분화를 중시합니다. 종류는 많지만 그 사이에 우열이 존재하진 않기 때문에 영7의 파밍엔 '실패'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특정한 아이템을 원했는데 얻지 못했다면 이는 개인적으로는 실패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게임 규칙상의 실패는 아닙니다. 파밍은 항상 성공이며 그 중 조금 더 나은 성공이 있을 수 있을 뿐인 것이죠.

아참, 덱이라고 했습니다만, CCG나 TCG의 그것과 같은, 조합에서 오는 수평적 다양성은 아주 큰 의미는 없습니다. CCG나 TCG의 카드는 그 자체가 게임 내에서 가장 중요한 게임 토큰이며, 개개 카드의 개성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조합하는 것이 게임의 핵심적 재미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영7의 핵심 토큰은 캐릭터이며, 장비 조합은 결국 캐릭터에 종속됩니다. 물공 캐릭터엔 물공 템을 끼워주고 마공 캐릭터엔 마공 템을 끼워주는 식이죠. 어느 정도 캐릭터의 특성에 맞춘 빌드가 있긴 하지만 결국은 캐릭터가 우선입니다.


3. 장비 파밍 결과의 수직적 다양성

결과물이 다양하긴 하지만 모두 대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결국 어떤 아이템을 얻든 사실상 동일한 결과가 되므로 파밍의 재미가 떨어지지 않느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만, 사실 파밍 결과에서 질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수직적인 분화가 존재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반 템과 레어템의 구분입니다. 위 스크린샷에서 보시듯 같은 코스트에 능력치 종류가 동일한 아이템이라도 '레어' 딱지가 붙은 템은 수치가 더 높으며, 레어 템을 얻는 것은 일반 템을 얻는 것 보다 더 나은 결과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레어 템을 제외한 나머지 템이 모두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아이템들은 고유의 장비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위 스크린샷처럼 공격을 받아 체력이 30%이하로 떨어지면 일정 확률로 5초간 물리 / 마법 공격력이 20% 증가한다거나, 일정 거리 내에 여자 캐릭터가 있으면 물리/마법 공격력이 5%씩 최대 3스택 증가한다거나 하는 등 일정한 조건에 의해 자동으로 발동되는 패시브 스킬들이죠. 비 레어템에도 이런 장비스킬이 붙은 템이 있고, 장비 스킬이 붙어있지 않은 레어템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레어템이 아니라도 장비 스킬이 붙은 템을 얻는 것은 의미있는 결과가 됩니다. (장비 스킬이 붙은 장비는 대신 기본 스텟이 코스트가 1~2점 낮은 장비와 유사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장비 스킬이 붙은 템이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든 구석이 있긴 합니다.)


레어템도 아니고 장비 스킬이 안붙었다고 해도 아직 실망하긴 이릅니다. 은장스킬이라고 해서 장비 스킬과 무관하게 '공격속도 증가 +2.96%'과 같은 추가 능력치가 랜덤하게 붙습니다. 특정 장비에 특정 전용 스킬이 붙는 장비 스킬과 달리 은장스킬은 템에 무관하게 랜덤하게 부여되기 때문에 어느 아이템에도 붙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장 스킬은 위 스크린샷 처럼 동일 코스트의 다른 아이템으로 전이시킬 수 있기 때문에 (재료와 대상 등급에 따라 성공확률이 있습니다) 은장스킬이 붙은 아이템을 파밍하는 것 또한 의미를 갖습니다.


레어 템도 아니고 장비 스킬도 없고 은장 스킬도 붙지 않은 템은 그럼 아무런 의미가 없냐면 그것 또한 아닙니다. 장비는 또한 캐릭터의 성급 성장 내에서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처음 영7을 소개시켜드릴 때 한번 언급했습니다만, 영7의 캐릭터들은 처음 획득할 때의 태생 등급은 다르더라도 모두 차별없이 S급 그리고 그 이상의 신기 레벨로 성급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A급 4성에서 S급 1성, S급 4성에서 신기 돌파 등 큰 의미를 갖는 단계에선 영혼 파편과 영혼 결정 외에 특정한 등급의 특정 장비가 재료로 요구됩니다. 여기서 또 한번의 가치를 부여받습니다. 물론 모든 장비가 승급 재료로 사용되지도 않고, 승급 재료로 요구되는 상황이 굉장히 잦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아무것도 붙지 않은 X템도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거죠.


4. 컨텐츠 고갈을 효과적으로 지연시키는 장비 성장

지금까지 영7이 다양성을 기반으로 파밍의 결과를 성공/실패로 나누기 보다는 기본적인 효용을 보장하면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파밍의 결과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굉장히 익숙한 요소 하나가 빠져있었죠. 장비의 등급입니다. 다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영7의 장비는 녹색 < 청색 < 보라색 < 금색으로 이어지는 등급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등급 장비를 획득하고, 장비의 등급을 높여나가는 방식에서 타 게임과 제법 차이를 보입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게임 내에서의 수직적인 성장이 장비 등급의 성장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부분입니다. 플레이를 통해 장비를 획득하는 게임에선 장비의 드랍이 수직적인 난이도 분포에 맞물려서 성장과 장비 획득이 연결되는 것이 굉장히 일반적인 문법입니다. 동일한 양의 자원(물리적 시간이나 행동력)을 소비해도 높은 스펙을 요구하는 컨텐츠의 보상이 양이나 질에서 더 낫기 때문에 더 높은 고난도 스테이지에 도전할 이유가 생기고, 그러기 위해 열심히 플레이하거나 돈을 써서 스펙을 키워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영7은 기본적으로 수직 성장을 강조하지 않는 게임이며, 장비의 드랍이 수직 성장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메인 스토리 모드를 플레이해도 장비를 얻을 수 있고 코옵 PVE인 시공난류를 플레이해도 장비를 얻을 수 있지만, 이들 컨텐츠들은 플레이 횟수가 제한되어있을 뿐더러 스펙에 따라 난이도가 구분되어있지 않고, 어느 컨텐츠를 플레이해도 보상은 거의 녹색에 아주 가끔 청색으로 일정합니다. (일부 일간 컨텐츠에선 보라색 템도 제한적으로 드랍되긴 합니다.) 고난도 고보상이 기본적인 문법이지만 애초에 컨텐츠가 난이도별로 쪼개져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구성이죠.

높은 등급의 장비를 얻기 위해선 얻은 장비의 등급을 높여나가야 하는데, 이 과정 또한 다소 특이합니다. 특정 장비를 바로 윗 등급으로 승급시키는 장치는 없고, 동일 등급의 장비 4개를 재료로 집어넣으면 그 중 1개를 골라 승급시켜주는 형식이거든요. (만일 강화해놓은 장비가 합성에서 탈락되면 장비는 사라지지만 강화 비용은 돌려줍니다.)

가장 안정적으로 승급하는 방법은 동일 등급 동일 아이템 4개를 합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너무 고단하다고 생각된다면 다른 아이템을 섞어서 확률에 맡길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도 평균적으로는 4개가 소모되겠지만요. 이러한 아이템 요구 수량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기하급수로 올라갑니다. 녹->청은 동일 녹템 4개면 되지만 금색 까지 올리기 위해선 64개가 필요하지요.

가뜩이나 템 종류가 많은데 같은 종류의 녹템 64개를 모으라고 하면 굉장히 잔혹합니다. 인벤토리 용량이 제한되어있고, 같은 템이라고 같은 슬롯에 여러개씩 중첩되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죠. 하지만 모든 아이템을 그런식으로 하드코어하게 합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류는 다르지만 마공템 끼리만 뭉쳐서 한 등급 위의 마공템을 얻겠다거나, 같은 코스트끼리만 뭉쳐서 코스트를 유지하겠다거나 아예 그냥 무작위로 계속 합쳐서 등급작을 우선시 하는 방법도 있지요. 어쨌든 게임을 오래하고 템을 계속 파밍해서 승급하다 보면 각 아이템들을 최고 등급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레어템의 경우는 합성 재료로 레어템을 2개 이상 집어넣으면 레어템 중에서만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보다 쉽게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어템도 아니고 스킬이나 추가 옵션도 없는 아이템들은 여기서 합성 재료로써의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특정 등급의 특정 장비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운 좋게 이미 인벤토리에 해당 장비가 존재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굉장히 힘든 길이 되겠죠. 이런 상황에 대한 구제책으로 게임 내에 경매장이 존재합니다. 경매장에서 사용되는 화폐인 젬가루는 1:10 환율로 유상 구매할 수도 있고 하루에 약 100점 정도 생산됩니다. 즉 돈이 있거나 게임을 적당히 오래 한 사용자는 특정 등급 특정 장비 획득을 비교적 쉽게 돌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른 유저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가진 자만 돈으로 쉽게 돌파한다는 정당성의 문제로부터도 자유롭지요.


이러한 장비 구조의 핵심은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스탯 성장이 장비의 획득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도 둘째는 가지고 있던 장비가 아무리 많아도 새 장비를 고등급으로 얻기 위해선 새 장비를 얻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소 생소한 이 구조가 갖는 장점은 장비라는 컨텐츠가 너무 빨리 소모되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용자 입장에선 높은 난이도를 돌았으니 더 높은 등급의 장비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한 보상 체계는 플레이어의 성장에 의해 컨텐츠가 점점 더 빨리 소모되게 됩니다.  그리고 컨텐츠가 고갈되어 신규 컨텐츠를 집어넣어도 컨텐츠를 고갈시킨 바로 그 상위권 사용자들이 더 높은 등급의 장비를 더 많이, 더 빨리 획득하면서 새 컨텐츠를 소진시켜버리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억지로 등급을 늘린다거나, '각성'이니 '제작'이니 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갖다 붙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고인물이 순식간에 컨텐츠를 소비하는 현상을 어느정도 억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기반이 되는 재료의 조달에서 고인물들이 더 유리하기 때문에 뉴비들이 고인물들 보다도 훨씬 더 어렵게 따라가야한다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장기 운영을 위해선 뉴비들이 쉽게 정착하고 고인물들을 위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고인물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구조 하에선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영7은 장비에 대해서 이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풀어나갑니다. 애초에 장비를 획득하는 컨텐츠와 수직 성장을 연결짓지 않기 때문에 스펙이 높은 플레이어라고 해서 더 나은 보상을 지급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장비를 새 장비 획득과 연결짓지 않기 때문에 뉴비든 고인물이든 새 장비를 금템으로 맞추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벤트 등을 통해 제한적으로 고등급 아이템을 모든 플레이어에게 뿌려주는 등의 방법으로 공평하면서도 선택적으로 뉴비들을 지원해줄 수 있지요. (같은 보상을 지급하므로 형평성 문제는 없지만, 기본 스펙/장비가 낮은 뉴비가 누리는 효용이 더 큽니다.)

자원의 수급에서 구조적인 기득권은 인정하지 않지만, 축적한 자원 자체는 인정됩니다. 오래 플레이했으면 그만큼 많은 금템을 가지고 있고, 분명히 이는 뉴비보다 유리합니다. 잉여 금템을 경매장에 팔아서 젬가루로 만들 수도 있지요. 오래하고 더 강한 것에 대한 '구조적이고 추가적이며 비가역적인' 보너스가 없을 뿐, 기본적으로 고인물이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유리함은 변함이 없습니다.



5. 누적된 장비를 처리하는 랜덤 기반의 장비 성장 엔드 컨텐츠

합성은 금템까지입니다만, 금템 이후에도 장비 성장이 가능합니다. 오히려 금템은 장비 파밍의 엔드 컨텐츠에 진입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네요. 일단 금템이 되면 '세련'이라는 기능이 생겨납니다. 세련제라는 자원과 소량의 골드를 소비해서 기본 능력치를 랜덤하게 재추첨합니다. 능력치의 종류는 두고, 수치만 랜덤하게 바꾸는 것이죠. 추첨에서 나올 수 있는 값의 범위 내에서 현재 추첨된 값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해당하는지를 알려줌으로써 지속적인 재시도를 조장합니다. 세련제는 일간 생산량이 정해져있고,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으나 일간 구매 수량이 제한되어있습니다.


한편 금템은 '돌파'를 통해 주황색 템으로 승급시킬 수 있습니다. 돌파는 동일 코스트의 금템 2개와 돌파용 희귀자원을 소비하는데 원래 금템이 갖고 있던 능력치는 바뀌지 않지만 돌파 속성이라고 해서 새로운 스탯이 추가됩니다. (위 영상 22초 지점에서 오른쪽 아래 주황색으로 되어있는 능력치들입니다.)


22초 스크린샷에서 돌파 능력치 옆에도 막대기가 붙어있는 것을 눈치 채신 분이 계실까요? 돌파 능력치 역시 랜덤하게 부여되고, 랜덤 추첨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추첨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돌파 리셋은 돌파보다는 적은 자원을 소모하여, 동일 코스트 금템 1개와 소량의 젬가루를 요구합니다. 돌파 리셋은 세련과 달리 능력치의 종류와 수치가 모두 랜덤하게 추첨됩니다.

이러한 세련과 정련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남아도는 장비들을 소진시키는 자원의 하수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재료'와 '결과를 남기는 방식'입니다. 영7은 레어템 여부, 장비 스킬, 속성 스킬, 캐릭터 승급 재료 등 여러 단계에 걸쳐 파밍한 장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필터에 걸리지 않는 잉여 자원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잉여 자원들을 장비 성장의 엔드 컨텐츠인 세련 / 돌파의 핵심 자원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잉여 자원은 계속해서 축적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1강이니 +20강과 같이 계속해서 축적되는 형식으로 장비 성장의 엔드 컨텐츠를 꾸린다면, 잉여 자원이 많은 고인물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X강이 무한히 이어지지 않는 이상은 그 컨텐츠마저도 고갈되는 순간이 오겠죠. 또 그렇게 누적된 보너스가 클 수록 새 장비를 컨텐츠로 추가했을 때의 효용이 줄어들게 됩니다.

영7은 결과물을 랜덤하게 남기는 디자인으로 이 문제를 회피합니다. 이전의 돌파 / 세련 결과는 누적되지 않고 시도할 때 마다 결과물이 랜덤하게 결정됩니다. 자원이 많은 고인물이 더 많이 시도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더 나은 수치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직접적으로 더 나은 결과가 보장되진 않습니다. 최고의 결과를 원한다면 그에 들어가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올라가지만 적당한 결과를 염두에 둔다면 비용도 그리 비싸지 않아서 뉴비도 쉽게 접근할 수 있지요.

어떤 게임들은 유사하게 장비에 랜덤옵션을 부여한 이후에 이를 재추첨하는 데 유상화폐나, 주로 유상으로 구입할 수 있는 티켓 등을 소모시키게 하곤 합니다만 그보다는 이 디자인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됩니다. 동일한 등급에서 동일한 템을 새로 하나 얻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효용을 가져오기 때문에 비용은 그에 맞춰 산정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유상젬으로 판매하겠다고 하면 대체로 플레이어들은 새로운 아이템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1가챠 이하의 비용을 정당하다고 인식하며 그에 맞춰 비용이 책정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서비스 가치에 비해 너무 저렴한 비용으로 컨텐츠를 순식간에 소진시키면서 과금자와 무과금자 사이의 격차를 크게 벌리게 됩니다. 그보다는 게임 내에서 생산되는 다른 자원 - 특히 장비를 소진시키는 쪽이 결과적으로 컨텐츠의 수명과 효용을 높일 수 있습니다. 무과금 / 저과금자도 도전할 수 있는 접근성을, 1차 템 파밍을 끝낸 고인물에게는 끝나지 않는 도전을, 뭐든지 돈으로 뛰어넘고자하는 초고과금자에겐 충분히 비싼 시간 단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죠.

또한가지 눈여겨 봐야할 부분은 랜덤성이 적용되는 시점입니다. 금색까지 승급하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가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습니다. 합성의 결과물이 재료 4개 중 랜덤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 재료 4개를 선택하는 것은 플레이어죠. 즉 금색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확정성이 존재합니다. 랜덤 추첨이 작용하는 구간은 금색 이후이기 때문에, 세련 / 돌파 / 돌파 리셋 결과가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때까지 키워온 장비의 기본 가치엔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랜덤 추첨 결과가 나쁘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고, 금템 / 주황템은 여전히 유지되며, 적은 비용으로 재도전할 수 있지요. 힘들게 합성작하면서 등급을 높여왔는데 맨 마지막 최고 등급 합성에서 최고 등급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 제일 구린 물건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기존의 노력이 무가치한 쓰레기로 결정나는 상황은 오지 않습니다.


6. 공통 장비 - 전용장비 구분으로 성장 스트레스 완화

이 세련 / 돌파 / 재돌파 시스템이 무한정의 자원을 소비하게 만드는 것은 컨텐츠 소비 측면에선 장점이지만 수집형 RPG에선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키워야할 캐릭터가 정말 많은데 개별 캐릭터의 장비들을 하나하나 모두 합성하고 세련하고 돌파하려면 들어가는 자원이 정말 감당이 안되죠. 아무리 다른 캐릭터에게 이전시켜주면 된다고는 하지만, 결국 캐릭터가 추가될수록 장비 성장 부담은 기하급수로 커졌고 이것이 영7 서비스 초기엔 문제였습니다. (물론 핵과금러들은 말 그대로 핵과금을 쏟아부어 주황템으로 도배시키곤 했습니다.)

이 문제는 지난달부터 장비 장착 규칙을 변경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과거엔 각 장비는 1개의 캐릭터만 장착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복수 캐릭터가 동일한 장비를 장착할 수 있게 된 거죠. 한 캐릭터만 장착한 아이템은 위 스크린샷처럼 해당 캐릭터의 얼굴이 나타나고, 여러 캐릭터가 장착한 아이템은 기울어진 ∞ 아이콘으로 표시됩니다.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파밍 규모를 기하급수로 줄여버리게 되면 게임에선 뭘 시키나 싶겠습니다만, 이는 게임의 컨텐츠 배치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최근 몇달간 수평적 성장을 활용하는 컨텐츠 못지 않게 수직적 성장을 강조하는 컨텐츠도 다수 추가되었고 그 일환으로 특정 캐릭터만 장착할 수 있는 캐릭터 전용 장비가 추가되었습니다. 장비를 얻고 육성하는데 드는 자원이 모두 난이도에 따라 보상이 향상되는 컨텐츠에 물려있어 기존의 장비와는 완전히 별개로 동작하는 컨텐츠죠. 관련 사항은 일-중 수집형 RPG BM연구 2부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7. 기획자의 눈을 띄우는 게임

게임을 플레이하면 그 보상으로 능력치에 보너스를 더해주는 '장비'라는 아이템을 얻습니다. 장비를 장착하면 캐릭터는 일정한 능력치 보너스를 얻고, 플레이어는 장비의 구성을 통해 전해줄 능력치를 조합할 수 있습니다. 장비엔 등급이 있어 등급이 높을수록 더 높은 보너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게임들의 장비와 동일합니다. 바꿔말하자면 저 기본적인 규칙을 제외한 다른 모든 면이 이전까지의 게임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이러한 영7의 파격적인 디자인들이 흥미로운 것은, 서두에서 말한 것과 같이 기존의 익숙한 문법이 갖고 있던 익숙한 - 그리고 좀처럼 풀리지 않던 -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나 익숙하게 당연시해와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들을 문제로 인식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이겠죠. 랜덤한 파밍의 결과가 소수의 성공과 다수의 실패로 나뉘는 것은 이제까지 당연한 것이었고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왔습니다. 영7은 여기서 실패는 없애고 성공은 다양한 성공으로 나눔으로써 실패의 부정적인 경험은 없애면서도 결과물의 다양성에 대한 즐거움만 남겨놓았죠. 장비의 수직 성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 누적된 자원에 의한 수직적인 성장은 필연적으로 효과 뿐만 아니라 비용에서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고 서비스가 진행될수록 뉴비와 고인물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영7은 수직 성장을 확정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와 그 이후의 랜덤한 단계로 구분함으로써 이 문제를 회피합니다. 엔드 컨텐츠까지는 뉴비도 쉽게 도달하지만 엔드 컨텐츠의 정복은 어렵게, 그러면서도 고인물이 그동안 쌓아둔 것에 대한 효용은 보장하는 절묘한 디자인이죠.

사실 영7이 상업적으로 굉장히 크게 성공한 게임은 아닙니다. 꾸준히 30위권에 머물면서 200억을 쓸어담은 첫 한달을 제외하곤 계속해서 200위권에 머물다가 새 캐릭터가 나오면 2~3일 반짝 50위권에 진입하는 것이 고작이지요. 그래서 영7의 디자인이 돈을 벌어다줄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이냐고 물으신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힘듭니다. 그럼에도 제가 여러분에게 이 게임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것은, 게임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수집형 게임으로써 수직 성장은 즐길 컨텐츠로 남겨두고, 수평 성장에 집중시킨다는 방향이 돈을 버는데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7의 게임 요소들은 그 방향에 아주 합치하는 방향으로 잘 정돈되어있습니다. (나중에 따로 다루겠지만, 수직성장의 체감부족에서 오는 장기 플레이 동기부여 문제는 또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요소들을 재평가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문제의 정확한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영원히 그 문제는 고쳐질 수 없지요. 영7은 우리의 '익숙함'을 걷어내고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 요소가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기획자에겐 아주 보약같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과거 매스이펙트2가 RPG의 '기본' 구성 요소들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과감한 질문을 던지고, 길드워2가 MMORPG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선보였던 것 처럼 말이죠.

재미난 점은 이러한 디자인 적 파격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넷이즈는 이미 도탑전기를 벗어난 수집형 RPG로 음양사를 만들어 어느 도탑전기류 게임보다도 큰 성공을 거둔 게임입니다. 엔간하면 음양사의 '검증된' 디자인을 바탕으로 스킨만 바꿔서 장사를 해도 될텐데, 영7은 그런 음양사와도 다른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도탑전기에서 장기 흥행이 힘들다는 문제를 인식하고 아예 다른 구조의 음양사를 만든 것 처럼, 장비 컨텐츠가 빨리 고갈된다거나 수집형 게임으로써 캐릭터의 수직 성장이 느리다거나 하는 등 음양사에서 발견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구조를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죠. 초거대기업임에도 불구하고 넷이즈가 가진 개발사로서의 야성이 잘 드러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8. 영7 한국 서비스 관련 정보

영원한 7일의 도시 한국 서비스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상반기 출시 예정이라네요. 네이버에 공식 까페가 개설되었습니다.

http://cafe.naver.com/f7days

DC 마이너 갤러리에선 영7과 관련한 정보들을 보기 쉬운 새로운 포멧으로 정리하였습니다.

https://docs.google.com/spreadsheets/d/e/2PACX-1vSDL3wBGMQRZj7gBsq4iwT5zWKGSePjBWLKBQKKFJBMObdy-nyb5iK4_F7YBYkV8i9tqdR5rin_N6Ic/pubhtml



by 고금아 2018. 5. 6. 1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