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잡상재생유한회사에서 소개된 글로, 일단 연구소 이전 기념으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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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국내 정발판을 찾은 김에 소개하려는 게임은  턴제 정통 1인칭 RPG인 Wizards and Warriors(이하 W&W)가 되겠다. 아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게임은 무려 7년전인 2000년에 발매된 게임이고, 장르도 당시 이미 멸종위기였던 1인칭 던전 RPG인데다가 버그도 많고 인터페이스는 불편하고 그래픽은 2000년 당시 기준으로도 평균 이하에 스토리도 그야말로 구태의연해 쫄딱망하고 배급사에서 홈페이지조차 없애버린 B급 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리기엔 아쉬움이 남는 나름 수작이라 굳이 이렇게 소개하고자 한다.

W&W를 이야기하려면 한때 세계 3대 RPG중 하나로 꼽혔던 Wizardry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은 장르가 같고, 21세기 이후 이 장르로 발매된 게임이 이 둘 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실질적으로 두 게임이 혈연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W&W를 제작한 D.W.Bradley는 원래 Sir-Tech에서 Wizardry 시리즈를 제작한 핵심 기획자였다. Wizardry8의 개발이 계속 지연되자,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Heuristic Park라는 회살르 차려 만든 것이 W&W인 것이다. 한편 Sir-Tech은 재기드 얼라이언스의 성공으로 자금에 다소 숨통이 트이자 Bradley 없이 시리즈의 최신작인 Wizardry8를 개발해 발매했다. 즉,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복형제 뻘 되는 셈이다.

원래 Wizardry 시리즈는 게임이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 마법만 하더라도 위저드계-성직자계-연금술사계-싸이킥계 등 4가지 계열로 갈리는데다가 각 계열별로 불-물-바람-땅-정신-신성의 여섯가지 영역으로 다시 나뉘어 MP를 따로 관리한다. 여기에 마법을 쓸 때 마다 어느정도의 강도로 사용할건지(강도가 높을수록 효과는 크고, MP소모는 늘어나며, 실패할 확률이 증가한다.)를 결정해야 한다고 하면 얼마나 복잡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니 소수의 매니아를 제외한 나머지 유저들에게서 외면당한다고해도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다. 지금의 슈팅게임처럼 말이다.
 
Wizardry8은 이런 전편의 시스템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은 반면, W&W는 기본적인 시스템은 Wizardry 시리즈에서 따오면서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간략화시켰다. 이는 아마도 시스템을 좀 더 쉽게 만들어 기존의 1인칭 RPG 팬 외에 새로운 유저를 포섭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하게 실패하였는데, 그도 그럴것이 기존의 1인칭 RPG 팬들도 시장에서 사라지는 마당에 새로운 유저가 나타날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오랫동안 Wizardry를 기다려온 기존의 팬들의 입맛에 W&W의 간략화된 시스템은 오히려 싱거웠기 때문에 오히려 매니아들은 Wizardry8의 시스템을 지지해버렸다. 물론 여기에는 시스템은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커서만 갖다대면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게 배려한 Wizardry8의 도움말 덕분에 시스템을 이해하기 쉬웠다는 점도 한몫 했다. W&W같은 경우엔 이러한 도움말 기능이 빈약해 시스템적으로는 더 간략하면서도 오히려 더 이해하기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던 전 구성에 있어서는 W&W가 오히려 Wizardry8보다 적자에 더 가깝다. Wizardry8 같은 경우는 명색이 정통 1인칭 던전 RPG이면서도 던전보다는 오히려 야외에서 플레이타임이 길었고 대부분의 던전이 일단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끝까지 갈 수 있는 단순한 구조에다가 중간에 빠져나오기도 쉬웠던 것이다. 반면 W&W는 던전 자체가 많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던전 내부에서 막혀있는 길이나 일방통행, 숨겨졌거나 손이 닿지 않는 레버 등 퍼즐 요소가 많아서 들어가긴 쉬워도 나오긴 어렵다.(심지어 첫 던전은 어느정도 깨지 않으면 아예 나올수도 없다.) 던전을 빠져나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던전을 끝까지 깨는 것인데 일단 퍼즐이 풀리고 나면 막혔던 길들이 뚫리면서 간단히 빠져나오게 되는 구조는 던전형 RPG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Wizardry8보다 나은 점은 여럿 있다. 이를테면 스크린샷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실시간 미니맵을 지원하고 있고(Wizardry8에서는 지도를 보려면 따로 메뉴를 불러와야 했다.), 마을 같은 경우는 아예 과감하게 포인트 앤 클릭 방식으로 구현해 쓸데없이 시간을 소모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런 장르에선 공식이라고 할 수 있는 캠핑(던전이나 필드에서 잠을 잠으로써 HP와 MP등을 회복하는 행위)도 생략하고, 필드에서 시간을 보내면 자동으로 회복되도록 했는데 이 부분은 찬반 논쟁이 분분하기도 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직업 시스템이다. 10여종이 넘는 다양한 직업 자체는 Wizardry8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Wizardry8이 이런 직업을 처음부터 선택할 수 있게 한 데 반해, W&W에서는 간단한 전사, 도둑 같은 기본 직업으로 시작했다가 게임 도중에 다른 고급 직업으로 전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 고민할 거리를 줄여주고, 게임에 익숙해진 사용자에게도 새로운 즐길거리를 준다는 의도인 것 같은데, 전직 조건을 맞춰야 하는 부분에선 오히려 난이도가 올라가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부분적으로 호오가 갈리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W&W가 게임성이라는 측면에서 Wizardry8보다 뛰어나다고는 못해도 뒤떨어진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왜 Wizardry8는 역사상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1인칭 RPG로 남은반면 W&W는 B급 게임으로 사라져야 했을까? 역시 문제는 인터페이스와 버그에 있었다.

인터페이스의 중요성은 이미 MP3업계에서 아이팟이 증명한 바가 있다. 일단 곡을 틀어놓으면 건드릴 일이 없는 음악 재생기에서도 인터페이스가 중요하거늘, 항상 사용자의 조작을 필요로하는 게임에서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W&W는 이 인터페이스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여럿 안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화면이 어두운데, 감마값을 높이기 위해선 한번 게임을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정도는 자주 만지는 부분이 아니니 애교라고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정통 1인칭 RPG의 공식을 구태의연하게 답습해 대화할 내용을 일일이 타이핑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Wizardry8의 경우, 직접 타이핑할 수도 있지만 게임 진행상 중요한 주요 단어들은 목록에서 고를 수도 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줍기 힘들다든지 하는 등의 문제는 시대착오를 넘어서 개념의 탑재 여부를 의심스럽게 한다. 게임 진행에 필요한 동전을 줍기 위해 10분동안 마우스 클릭질을 했던 기억은 정말로 뼈아프다.
 
 지금은 버그로 말아먹은 게임의 신화가 되어버린 울티마9이나, 템플오브엘레멘탈이블 만큼은 아니지만, 버그 문제도 흥행의 실패에 크게 기여했다. 같이 게임을 했던 한 친구는 올라간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질 않아 게임을 관둬야 했고, 나같은 경우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부분에서 배가 어이없게도 강바닥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_=;;;;;;) 중도에 게임을 접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AVI로 만들어진 마을 파일에 문제가 있어 윈도우 2000 계열에선 버츄얼덥을 사용해 무손실로 다시 인코딩 해야 했던 정도는 오히려 애교에 가까웠다.

Wizardry8 도 W&W도 시대착오적인 게임이긴 마찬가지였다. 90년대 중반부터 이미 RPG라는 장르 자체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고, 그 명맥을 이어가는 것도 이미 디아블로를 위시한 크로스오버 게임들일 뿐, 정통 1인칭 던전 RPG가 설 곳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때 마이트앤매직이 부활하나 싶었지만 코나미 위닝 우려먹기보다 더 지독하고 불성실한 우려먹기로 1인칭 RPG는 끝났다는 인식만 더 심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Wizardry8은 적어도 평가에서만큼은 대성공을 거둔 반면 W&W은 그 반대의 결과를 거두었다.

어쩌면 Wizardry8의 대성공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팬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화답이라고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반면 W&W는 기존의 팬들 외에 새로운 유저를 끌어안으려고 여러가지 시도를 했지만 그런 의도 자체가 무리였고, 그나마도 불성실한 마무리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 글에서는 W&W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다보니 본의아니게 Wizardry8을 깎아내린 측면이 없지 않은데, 어디까지나 W&W가 저평가받았다는 이야기일 뿐이지 Wizardry8이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게임스팟 9점대는 쉽게 받을 수 있는 점수가 아니고 명작이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W&W와 달리 Wizardry8는 그 평판과 지명도 덕분에 1인칭 던전 RPG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도 웹하드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고전적인 RPG에 흥미가 있다면 한번 즐겨보기를 권장한다. 소위 어둠의 경로라는 것이긴 하지만, 국내엔 정식 발매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이미 6년이 지나 해외에서도 정품 구하기가 쉽지 않다.

-덧-
원래 해외 쇼핑몰에서 딸라주고 구입한 게임이었지만, 입대전 쯔음 해서 정품 CD를 잃어버렸다. 그동안 각종 쇼핑몰과 웹하드 등을 뒤지다 실패하고 포기하던 중, 이번에 희귀게임전문 쇼핑몰에서 BISCO에서 출시했던 국내 정발판을 발견했는데 무려 7년전에, 그것도 주얼로도 나오지 못할만큼 망한 게임을 2만9천원에 산다는 것이 다소 억울하긴 했지만 아마존에서 중고를 구매대행으로 사는 것 보다는 싸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덧2-
이 게임 파는 곳에 갔더니 뱀파이어 마스쿼레이드 리뎀션 염가판이 1만9천원에 올라와있더라. 재고수량1의 압박이 상당했으나, 잔고가 부족해서 지를 수 없었다.
by 고금아 2007. 12. 31.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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