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몰락한 가문의 서자

Might & Magic(이하 M&M)이라는 타이틀은 듣기만 해도 짠한 기분이 들게 한다. 초기엔 퀘스트 중심의 울티마, 던전 중심의 위저드리와 달리 뚜렷한 지향점 없이 물량 만으로 간신히 3대 RPG에 끼었다. 하지만 울티마 위저드리 모두 신작이 출시되지 않던 90년대 후반, 2.5D를 받아들인 6편을 출시함으로써 이른바 '정통' RPG의 맹주로 거듭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RPG는 이제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 거지'라며 6편 엔진 그대로 7,8편을 찍어내며 몰락을 자초했다. 이러한 방침에 개발자들이 반발하자 잘라버리고 시간에 쫓겨 만든 9편이 폭망하면서 결국 New World Computing은 파산했다. 이후 Ubi Soft가 M&M의 IP를 사들여 Heroes of Might and Magic(이하 HOMM) 외에 M&M의 타이틀로 다양한 게임들을 출시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보면 비천한 출신을 딛고 영웅이 되었다가 초심을 잃고 몰락한 뒤 후손들이 근근히 살아가는 한 귀족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여하튼 오늘 소개할 Might & Magic : Clash of Heroes (이하 COH)는 Ubi가 부지런히 뿌리고 있는 씨앗 들 중 하나로 캐나다의 Capybara Games에서 개발되었다. 2009년 닌텐도 DS용으로 먼저 발매되었고 2011년 HD로 리마스터 되어 엑스박스 라이브 아케이드와 PSN, 그리고 PC로 출시되기도 했다.

스토리 상으로는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5의 프리퀄에 해당한다고는 하지만, 게임 플레이는 M&M이나 HOMM과 전혀 무관하게 퍼즐 RPG 형식을 지니고 있다. '서자'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 퍼즐과 RPG의 결합?

RPG도 퍼즐도 각기 인기있는 장르지만 둘을 합친 복합장르의 게임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게임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적된 플레이가 정량적으로 게임에 재투입되는 RPG와 달리 퍼즐은 그렇지 않다는 것. 쉽게 말하자면 RPG는 레벨이 깡패인데 이걸 퍼즐에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문제는 대결구도를 만들고 그 안에 성장요소를 집어넣는 건데, 이게 안되면 RPG의 핵심인 성장과 결합이 힘들다. 액션 중에서도 대결이 없는 플랫포머는 RPG와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뿌요뿌요나 아이돌 머니 익스체인저와 같이 대결 구도를 가진 퍼즐 게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 대결 구도에 레벨로 대표되는 플레이어의 정량적 성장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이것이 항상 문제였다. 퍼즐퀘스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좌 : Puzzle Quest. 출처는 위키피디아. 우 : Sword & Poker. 출처는 Gaia 공식 홈페이지)


(Runespell : Overture. 출처는 스팀)

2007년 발매된 퍼즐퀘스트는 비쥬얼드 규칙(애니팡 규칙이라고 하는게 더 이해가 빠르려나?)으로 없앤 보석의 색깔에 따라 마나를 얻고, 이 마나로 마법을 써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형식으로 전투를 구현해냈다. 드디어 퍼즐과 대결과 성장의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일단 가능성이 확인되자 다양한 작품이 쏟아져나왔다. Puzzle & Quest는 전통적인 5X5 포커 퍼즐을 RPG와 결합시켰고 Runespell : Overture는 윈도우에 기본으로 깔려있는 '카드놀이'와 RPG를 결합시켰다.


2. 보다 적극적인 전투와 퍼즐의 융합

퍼즐 RPG로서 M&M COH가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은 퍼즐의 객체와 전투의 주체가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존의 퍼즐 RPG에서 퍼즐은 자원 또는 공격 기회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렇게 만들어진 자원을 통해 대상을 공격한다. 퍼즐 퀘스트의 보석들이나 소드 & 포커 및 룬스펠에서 카드들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한다. 반면 M&M COH에서는 바닥에 깔려있는 유닛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이들 유닛을 어떻게 운용하는지가 퍼즐을 구성한다.

(좌 : Astro Pop. 출처는 iplay.com/ 우 : Magical Drop 출처는 retrogamer.net)

퍼즐의 기본 원리는 상단의 Astro Pop이나 Magical Drop처럼 Pull & Push Match 3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이름은 본 연구원이 임의로 붙인 것으로, 정확한 명칭에 대한 제보를 받고 있다. 또한 이 형식을 처음으로 창안한 게임의 제목 또한 제보 받는다.) 이 형식의 기본 매커니즘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1. 블록들은 최 상단에서부터 아래로 쌓여 내려온다.
    2. 유저는 각 열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한 블럭을 가져올 수 있다.
    3. 가져온 블럭을 원하는 열의 맨 아래에 붙일 수 있다.
    4. 이런 조작의 결과로 동일한 블럭이 3개 이상 연결되면 해당 블럭들은 사라진다.


M&M COH에서는 각 유닛들이 블록의 역할을 한다. 즉, 플레이어는 쌓여있는 유닛들 중 가장 가까운 유닛을 다른 열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만일 같은 유닛이 세로로 3개 붙으면 해당 유닛들로 공격대가 형성되고, 가로로 3개가 붙으면 벽을 만든다. 공격대는 말 그대로 상대방 캐릭터를 공격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벽은 자기 캐릭터와 유닛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공격대가 벽과 유닛들을 뚫고 화면상에 보이는 최종 방어선 (상하단, HP바 옆으로 이어진 선)에 닿게 되면 캐릭터에게 직접 데미지를 입힌다. 최종적으로 HP가 0이 된 캐릭터는 전투에서 패배한다.

단, 이것이 기존의 게임들처럼 실시간으로 진행되지는 않고 턴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매 턴마다 플레이어(및 상대 NPC)는 3점의 행동 포인트를 얻고 1점의 행동 포인트를 소모해 블럭을 옮기거나, 원하는 블럭 하나를 제거하거나, 유닛을 추가로 불러올 수 있다. 블럭을 제거할 때엔 위치에 관계 없이 원하는 블럭을 제거할 수 있고, 제거로 인해 벽이나 공격유닛이 형성되면 1점의 행동 포인트를 획득한다. 또한 유닛은 무제한으로 추가할 수 없고 죽거나 공격에 소모됨으로 인해 전장에서 제거된 유닛 들만 한꺼번에 데려올 수 있다.

공격대는 결성 즉시 공격하지 않고 정해진 턴이 지난 후에 공격에 들어간다. (화면상에 보이는 2,1이 각 2턴과 1턴 뒤에 공격한다는 의미이다.) 같은 색깔의 공격대가 같은 타이밍에 공격하게 되면 연쇄가 발생해서 더 큰 데미지를 줄 수 있다. 또한 공격대는 전방으로 직진하는데, 만일 전방에 벽이나 유닛이 있다면 이들과 전투를 벌이며 이 과정에서 공격대의 HP가 0이 되면 소멸한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다.)

이 외에 플레이어 캐릭터 본인의 공격 스킬로 상대를 공격할 수도 있는데 사실 이 게임에서 M&M 스러운 구석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정확히는 HOMM스러운 부분이지만)

기존의 Pull & Push RPG는 테트리스나 뿌요뿌요와 마찬가지로 신중한 고민 보다는 빠른 시간 내에 패턴을 찾는 유형의 플레이를 추구하는 퍼즐이었다. 하지만 M&M COH는 이에 직접적인 대결 구도와 턴제를 도입함으로써 마치 장기나 체스를 두는 것 처럼 전체 퍼즐을 내려다보며 한수 한수 신중히 움직이는 퍼즐로 바꿔버렸다. 아예 전혀 다른 퍼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퍼즐이 매우 재미있다.


3. 있을 건 다 있는 RPG 요소

그렇다면 이번엔 RPG 요소를 한번 찾아보자.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RPG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성장요소다. 플레이어 캐릭터와 유닛들 모두 고유의 HP와 능력치를 지니고 있다. 전투를 통해 경험치를 얻고, 레벨이 오르면 이들 능력치가 성장하는데 유저 임의로 능력치를 분배할 수는 없다. 또한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는데 각 아이템별로 다양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탐험 단계에서는 화면상에 보이는 각 스팟들을 클릭함으로써 해당 스팟으로 이동하며, NPC와의 대화가 가능하다. 또한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는데 메인 퀘스트외에 서브 퀘스트도 존재하고 ! / ? 로 퀘스트 여부를 표시하는 등 현대 RPG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은 다 지니고 있다.


4. 웰메이드 퍼즐 RPG

(3월의 라이온. 우미노 치카 작)

시간을 들여 캐릭터를 성장시켜가며 감정을 이입하는 RPG는 원래 인기 있는 장르이다. 주어진 문제를 풀어나가는 퍼즐 또한 인기 있는 장르이다. 재미있는 장르와 재미있는 장르를 합치면 무지 재미있는 장르가 나올 것 같지만, 사실 이 배합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잘 만든 퍼즐 RPG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반갑고도 유쾌한 경험이다. 아마존에서 연말 세일하길래 산 것이었는데, 이걸 왜 이제야 플레이했는지 아쉽다.


by 고금아 2012. 12. 19.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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