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밸브가 뭔가 큰 건을 하나 발표한다는 소식이 처음 들렸을 때, 대부분은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밸브의 게임 콘솔 스팀박스를 발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밸브는 리눅스를 기반으로 커스터마이징 된 스팀OS + 스팀 OS가 구동되는 하드웨어 + 스팀OS용 컨트롤러로 구성된 하나의 패키지를 발표했습니다.

저는 사실 스팀박스 자체의 미래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관적이었습니다만 발표 내용은 제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습니다. 오픈 아키텍쳐를 기반으로 한 게임용 콘솔이라뇨! 3DO의 재림을 보는 것 같았죠. 보자마자 DOA 사인이 왔습니다. 사실 리테일이 기반인 시장에서 디지털 마켓 & 다운로드 서비스 자체도 당시엔 말이 안되는 것이긴 했지만 이건 정말 심각한 과대망상으로 보였지요. 처음엔 스팀 OS 하드웨어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자 콘솔이라는 포장에서 오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떼어내고 생각하니 의외로 이게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걸 하나하나 풀어보려고 합니다.


1. 어째서 굳이 하향세인 거실용 콘솔인가?

HDTV는 분명 크고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선사합니다만, 그 반대 급부로 과거보다 큰 공간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과거 PS2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사실 방 안에 작은 TV 하나를 두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만 42인치 TV를 개인 방 안에 둔다는 건 사실 좀 어려운 일이긴 하죠. 설치부터 플레이까지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의 합의가 필요합니다. HD 해상도를 지원하지 못함에도 Wii가 그렇게 불티나게 팔렸던 것은 한 명의 게이머를 위한 기기가 아니라 공동 공간인 거실에서 가족 전체가, 게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재미나게 놀 수 있는 장치로서 포지셔닝 된 덕이라고 전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놀이도구로 다른 콘솔과 다른 타겟층을 가진 Wii를 제외할 경우, 현세대기의 보급량은 오히려 전세대기보다 적습니다. (전세대 = PS2 1억5천5백만 + 엑박 2천4백만 = 1억7천9백만 / 현세대 = PS3 7천5백만 + 엑박360 7천8백2십만 = 1억6천3백2십만. 출처 : 위키피디아)

반면 개발비는 치솟았고, 그 결과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도 열광할 수 있는 AAA 급 게임들이 대박을 치지 않으면 수익을 내기 힘든 것이 현세대기가 처한 상황이죠. 그래서 전 개발비가 더 치솟을 차세대기 시장을 오히려 더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게임 콘솔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PS4보다 AAA 게임을 구동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셋탑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엑박원의 전략이 더 우수하다고 보았죠. 뭐 정신 나간 가격 때문에 맛이 가긴 했습니다만.

아무리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거실을 중심으로 한 콘솔 게임 시장이 스팀이 기반하고 있는 PC 시장보다는 훨씬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콘솔과 PC를 둘 다 보유하고 있는 게이머 입장에서, 거실을 주무대로 생각한다면 PC판 보다는 콘솔용을 구매하겠죠. 즉, 많은 점유율을 가져갈 수 있든 없든 거실 진입 자체가 스팀 입장에선 매출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밸브 입장에서 거실을 뚫고 싶긴 한데 게임을 구동하는 전용 콘솔로 뚫으려면 난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가격, 하드웨어 성능, 마케팅, 서드 파티 확보 등 고려해야할 사항이 한둘이 아니죠. 하지만 스트리밍으로 게임을 서비스하는 셋탑이라면 이미 타이틀들은 확보되어있고 하드웨어도 저렴한 가격에 공급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정도 사양이면 IPTV를 구동하는데에도 큰 문제가 없죠. 똑같이 게임 + IPTV 컨셉이지만 엑박원과는 차원이 다른 가격으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2. 스팀 고객들의 취향은 전통적 콘솔과 다르다.

또한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과연 스팀의 고객들이 거실에서의 게이밍을 원하냐는 것입니다. 먼저 스팀의 동접자 순위를 한번 살펴보죠.

위 도표는 스팀의 동접자 TOP 100 중 상위 30개만 추려낸 것입니다. DOTA2, 팀포트리스2, FM, 토탈워, 문명 등등 PC 독점작들이 상당히 많으며 이들 중 대다수가 인터페이스 상의 문제로 콘솔에서 패드로는 플레이하기 힘든 게임들입니다. 물론 콘솔에서도 잘나가는 게임들은 스팀에서도 잘 팔립니다만, 전체적으로 스팀 게이머들의 취향은 콘솔 게이머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밸브가 발표한 패드는 "이전에 키보드와 마우스로만 할 수 있었던 모든 게임은 이제 소파에서 할 수 있게 됩니다. 실시간 전략 게임, 마우스로 하는 간단한 게임, 전략 게임, 탐험+확장+착취+말살 우주 탐험 게임, 다양한 인디 게임, 시뮬레이션을 즐길 수 있다는 겁니다!" 라며 스팀이 기반하고 있는 PC 게임들을 플레이하기 편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PC 전용의 게임들도 불편하지 않게 거실에서 플레이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거죠.

우리는 스팀 OS가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이전 세대까지 엑박360이나 PS3으로 게임을 해온 콘솔 게이머가 엑박원이나 PS4가 아닌 스팀OS 하드웨어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PC로 게임을 해왔지만 가끔은 거실에서도 게임을 하고 싶은 게이머 계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계층을 상대로는 스팀 OS 하드웨어 외엔 대안이 없습니다.


3. 스팀의 콘솔은 충분한 타이틀들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인가?

콘솔이 자생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해당 콘솔에서 구동되는 소프트웨어들입니다. 아무리 콘솔이 저렴하거나 성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해당 콘솔에서 구동되는 타이틀이 충분치 않다면 해당 콘솔은 사실상 그 존재 의의가 퇴색되죠.

사실 서드 파티 개발사 입장에선 스팀 하드웨어 플랫폼이 시장에 충분히 보급되기 전까진 당장 얼마나 보급될지도 불확실한 스팀 하드웨어를 지원하기 위해 개발비를 지출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스팀 하드웨어는 PC처럼 완벽한 커스터마이징은 아닐지 몰라도 일단 당장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나만의 등의 수식어를 통해 다양한 하드웨어 구성을 지원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콘솔로 게임을 개발하는 또하나의 이유 - 단일한 하드웨어를 통한 개발의 용이함 - 이 사라지게 되죠. 언리얼 엔진4나 크라이엔진4에서 스팀 하드웨어의 포팅을 도와준다면 그냥 어차피 100억 쓸 꺼 101억 쓴다는 심정으로 추가 포팅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아직까지 에픽이나 크라이텍에서 스팀 하드웨어를 지원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밸브는 리눅스 기반으로 커스터마이징된 스팀OS를 공개하면서 이미 수백개가 넘는 게임들이 스팀OS를 지원하며 AAA 게임도 지원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그 리스트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PC 게임들 조차 스팀 OS보다 훨씬 많이 보급된 맥으로의 포팅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스팀OS의 타이틀 수급은 상당히 힘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밸브가 직접 공급하는 게임을 독점으로 묶어서 콘솔을 견인시키는 것입니다. 마소의 헤일로와 소니의 그란투리스모 처럼요. 물론 밸브 역시 하프라이프와 포털, 팀포트리스라는 막강한 IP를 소유하고 있긴 합니다. 레프트4 데드와 DOTA2 역시 잊어선 곤란하겠죠.

가마수트라에 따르면 하프라이프2의 시리즈 3편을 모두 합쳐도 판매량은 1100만장이 채 안됩니다.  하프 라이프2가 6백5십만장, 하프 라이프2 : 에피소드 1 1백40만장, (하프라이프2 : 에피소드2 외에 팀포트리스2와 포털1이 포함된) 오렌지박스가 3백만장이죠. 레프트 포 데드 역시 1,2편을 합쳐서 1200만장 가량입니다. 이 중 오렌지박스와 포탈2, 레프트 포 데드는 모두 멀티플랫폼이었죠. 과연 밸브가 이 퍼스트파티 게임들을 독점으로 묶어서 스팀 하드웨어에 베팅할 수 있을까요? (이미 오렌지박스와 레포데, 포탈을 공동으로 퍼블리싱 했던 EA와의 계약 문제는 없다고 가정할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 타이틀 문제도 스팀 OS 하드웨어가 직접 게임을 구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말끔하게 정리됩니다. 현세대기 초기엔 멀티 플랫폼 이식을 도와주는 미들웨어가 없었고 또한 플랫폼 홀더 측에서 개발비를 일부 지원하는 조건으로 독점 (또는 기간 독점)을 걸어 전용 게임들이 많았습니다만, 언리얼 엔진3가 발전하고 또 개발비가 치솟으면서 이제 왠만한 콘솔 게임들은 멀티 플랫폼으로 PC까지 지원하고 있습니다. 차세대기의 개발비가 더 오를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독점작이 아닌 이상은 PC로도 출시된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트리밍을 기반으로 생각할 때 스팀OS 플랫폼은 기본적으로 PC로 출시되는 게임들은 먹고 들어간다고 볼 수 있겠죠. 이때 스팀 OS 하드웨어의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일 거실에서 게임을 즐기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굳이 멀티 플랫폼 게임을 콘솔로 구매하고 있다면, 그냥 저렴하게 스팀OS 기기 하나 갖다놓고 PC와 거실 양쪽에서 즐기라는 겁니다.

또한 이렇게 스트리밍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자사의 킬러 타이틀들을 독점으로 묶을 필요도 없습니다. 콘솔로 팔리면 콘솔로 팔리는 대로, PC로 팔리면 PC로 팔리는대로 이득이죠.


4. 스팀의 하드웨어는 과연 PS4나 엑박원에 비해 경쟁력이 있는가?

사실 소프트웨어도 소프트웨어지만 하드웨어 자체의 경쟁력 또한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이 바로 하드웨어의 가격 문제죠. 엑박원이든 PS4든 기본적으로 대량생산 + 추후 공정 개선으로 생산 코스트가 줄어든다는 것과 일단 콘솔을 보급하면 나중에 로열티 수익이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로 생산비보다 낮은 가격에 밑지고 팔기 때문에 $399와 $499라는 가격이 책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팀 하드웨어는 밸브 독점 공급이 아닌 오픈 아키텍쳐를 내세우고 있지요. 밸브가 부품을 대량으로 발주하거나 손해를 감수할 의사도, 방법도 없는 시스템입니다.

또한 오픈 아키텍쳐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사실 엑박원이나 PS4와 같은 스펙으로 같은 성능을 낼 수 있을지 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이들은 특화된 OS를 가지고 있으며, 게임에서 성능을 내기 위한 특화된 하드웨어 구조를 지니고 있지요. 소음과 전력 소모, 발열은 덤입니다. 아니 사실 가격이든 소음이든 전력이든 발열이든 다 떠나서, 최적화는 둘째치고 게임이 제대로 구동될지조차 의심스럽죠.

이 모든 것을 정리하자면, 스팀 하드웨어는 엑박원과 PS4에서 돌아가는 게임이 돌아갈 수도 있고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엑박원과 PS4보다 같거나 비싼 가격에 그보다 같거나 못한 스펙을 가진 머신이 됩니다. 물론 지금도 고사양의 PC로는 현세대는 물론 차세대의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3만5천원짜리 엑박 패드 하나만 꽂으면 완벽하게 콘솔처럼 플레이할 수도 있지요. 굳이 거실에서 PC로 즐겨야 한다면 그냥 PC를 TV에 연결하고 말지 굳이 그 고사양 PC를 스팀OS  전용기로 한정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은  하지만 스트리밍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비싼 하드웨어를 쓸 필요도 없고, 또한 개개 하드웨어에 대해 치열하게 최적화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엑박원이나 PS4에 비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5. IPTV + PC 게임 스트리밍. 가격이 관건

엑박원이든 PS4 든, 거치형 콘솔들은 모두 게임은 거실에서 TV로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시장은 거실에 꼭 그 게임 콘솔을 갖다놓아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지요. 스팀 OS 하드웨어를 이들과 같은 독립적인 거치형 콘솔로 정의하게 된다면 가격 경쟁력, 타이틀 경쟁력 모두 기대하기 힘든, 시작부터 실패가 예정된 프로젝트가 됩니다. 나와서는 안될, 귀태 콘솔이죠.

발상을 바꿔서 게임은 PC로 플레이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가끔은 거실에서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일단 콘솔을 새로 구매하는 것은 매우 가성비가 떨어집니다. 콘솔 자체도 비싸고, PC와 콘솔 양쪽에서 게임을 구매해야하니까요.  하지만 저렴한 셋탑 박스를 추가하면 PC 게임을 TV로도 즐길 수 있다면, 그리고 여기에 스팀 특유의 세일과 쉬운 구매 & 설치가 붙어 나온다면 이건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지가 됩니다. 그리고 밸브 입장에서도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엑박원 & PS4로부터 점유율을 빼앗아올 수 있지요.

일단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스트리밍 게임이 콘솔 직결과 유사하거나, 적어도 불편을 느끼지는 않을 정도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엔비디아의 실드나 PS 비타가 스트리밍 게임을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둘 다 모바일 디바이스에 맞춰 해상도를 낮추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80 해상도로 품질 높은 스트리밍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사실 좀 의문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 부분만 해결된다면 콘솔 게이머와 PC 게이머, 캐주얼 게이머와 하드코어 게이머, 스탠드 얼론 게이머와 온라인 게이머 모두가 구매할만한 제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가격 문제 또한 짚고 넘어가야합니다. 스트리밍 셋탑이라는 가정 하에서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격은 $99 입니다. 셋톱박스로도 애플TV와 경쟁할 수 있는 가격이지요. 만일 이 가격을 지키기가 불가능하다면, 최대한으로 고려할 수 있는 가격은 셋탑 치고는 다소 비싸지만, 게임이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납득이 가는 선인 $199라고 봅니다. $200을 넘어서게 되면 WiiU와 비교되겠죠. 아무리 WiiU의 인기가 적다고는 하지만, 게임을 직접 구동하지 않는 스트리밍 기계가 전용기와 유사한 가격이라면 심리적인 저항선이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IPTV는 WiiU에도 있고 말이죠.

by 고금아 2013. 9. 24. 04:09